오피니언 에디터칼럼

남의 밥상 열심히 차리는 미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미국 정부는 이런 행태가 외제차 판매를 가로막는 불공정 행위라며 한국 정부에 거세게 항의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외제차 소유자=탈세 용의자'라는 황당한 등식이 사라졌다. 미국은 그 뒤에도 한국 자동차 시장의 폐쇄성을 문제 삼곤 했다. 수출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수입 시장의 문은 닫아건다는 불만이었다. 지난해도 미국으로 수출된 차는 70만 대였고 수입된 미국 차는 4000대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관세율이 여전히 높으며, 배기량을 기준으로 한 자동차 세제는 미국에 불리하다며 끊임없이 시정을 요구해 왔다. 미국 차는 대체로 배기량이 크다. 국토가 넓어 먼 길을 달릴 힘 좋은 차가 주종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차를 한국에 많이 팔려면 배기량을 기준으로 한 세제는 불리하다. 그래서 이것을 가격이나 연비 기준으로 바꾸라는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미국에 계속 차를 팔아야 하는 우리로선 그런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고, 상당 부분 수용했다. 외제차 수입을 처음 허용했던 1987년 50%였던 관세율이 8%로 떨어진 것에도 그런 연유가 있다. 배기량 3000㏄ 이상의 대형 승용차에 더 많은 세금을 물리던 제도도 고쳐 지금은 2000㏄만 넘으면 같은 세율이 적용된다. 한.미 군사동맹 이후 양국 간 최대 이슈였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테이블에서도 이 문제는 마지막 순간까지 올라 있었다. 미국은 이번에도 관세 폐지와 배기량 기준 세제 개편을 요구했다.

지금껏 미국 관리들이 이렇게 애써 여러 장벽을 낮추고 있지만 그 혜택이 과연 미국 차로 돌아갈지는 미지수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안 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실제로 그동안 미국의 요구로 우리가 고친 제도의 혜택을 본 곳은 다른 나라 회사들이었다.

지금 수입차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마침내 5% 벽을 넘어서고 있다. 올 1월 신규 등록된 수입차는 4365대였다. 전달에 비해 22%, 전년 동월에 비해 27% 늘어난 것이다. 이런 추세로 보면 올해 수입차 판매는 처음으로 5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미국 차들의 약진은 미미하다. 도요타의 고급 브랜드인 렉서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그 뒤를 BMW.아우디.폴크스바겐.벤츠.푸조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미국 차들의 부진은 한마디로 시장의 평가에 따른 결과다. 미국을 대표하는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는 지금 자기 나라에서조차 밀리고 있다. 잔고장이 많다는 불만이 주류를 이룬다. 한마디로 고객만족도가 낮다는 얘기다. 그 결과 GM과 포드의 시장점유율은 계속 하락하는 반면 일본의 대표 선수인 도요타와 혼다는 미국에서 질주하고 있다.

미국 협상팀이 어렵사리 한국 시장의 문턱을 낮춰 줘도 미국 기업이 그 혜택을 챙기지 못하면 그건 자국에 대한 일종의 배신 행위가 된다. 매출 부진을 겪고 있는 GM과 포드는 은퇴한 직원들의 의료보험료까지 부담하느라 지금 허리가 휘고 있다. 두 회사의 신용등급이 정크본드(투자 위험이 매우 높은 채권)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벌써 2년이 됐다. 이런 추세를 감안하면 앞으로 몇 년 내 GM은 도요타에 세계 정상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족 같지만 현대차에서도 배신감 비슷한 걸 느낀다. 현대차는 지금 한 해 370만 대를 만드는 세계 7대 메이커로 성장했다. 그런 성취 뒤에는 세무조사까지 들먹이며 내수시장을 지켜준 공무원들과 해외에서 현대차를 만나면 박수를 치던 국민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파업을 연례행사처럼 벌이며 스스로 경쟁력을 갉아먹는 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화가 치미는 것이다.

심상복 국제담당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