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아트홀 『마농의 샘』을 보고…정진우(영화감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고향의 땅에 「순수」를 심으려고 도시에서 낙향한 꼽추 청년 장(제라르 드파르디유분)은 그 땅을 탐내는 이웃의 놀부 같은 노인 세자르(이브 몽탕분)와 그의 조카 위골랭(다니엘 오테이분)의 음모에 휘말려 자신이 순수를 심으려던 땅에 묻히고 만다. 아버지의 비극을 눈으로 본 소녀 마농(엠마누엘 베아르분)은 복수를 결심한다.
1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여자의 한은 서릿발 같다」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마농이 정해놓은 스케줄대로 스베랑일가는 파멸하고 마농은 빼앗긴 땅과 가문의 명예를 원상회복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이야기가 우리 관객과의 접근을 용이하게 해준다.
이 영화를 감독한 클로드베리는 프랑스 제3세대의 대표적인 주자로 클로드 지지, 장 폴 라프노 등과 함께 감독으로서뿐 아니라 제작자로서도 상당한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의 영화가 만들어질 때마다 히트하는 것은 난해한 주제를 자랑했던 전후 프랑스 누벨바그와의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그렇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산간마을, 그것도 단 두 집만의 배경과 불과 다섯 사람만의 등장으로 인생과 신앙과 문명…모두를 우리에게 얘기해 준다. 영화가 시작되어 10분이 지나면 객석은 숨소리 하나 없는 침묵과 고요로 오직 스크린에 쏠린 채 3시간이 지나간다.
『벤허』처럼 스펙터클하지도 않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파란만장하지도 않지만 이 영화는 끈질긴 힘을 내뿜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 속에 잠재해 있는 영상의 마력인 것이다.
클로드 베리 감독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1년 전 현장에 캠프를 치고, 곡식을 심고, 꽃씨를 뿌려 그 꽃이 피면 영화를 찍곤 했다.
양치기 소녀를 해낸 엠마누엘 베아르는 산양보다 더 날렵한 모습으로 야성적인 연기를 해낸다.
만약 프랑스를 대표하는 제라르 드파르디유나 이브몽탕의 스크린을 꽉 채운 연기에도 불만을 느꼈다면 다니엘 오테이의 뛰어난 연기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요즘 극장에서 힘 깨나 쓰는 미국의 오락영화, 홍콩의 무술영화를 즐겨 보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수산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 쌓여 있는 생선더미를 구경하던 눈으로 제주도 앞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펄펄 뛰는 생선을 보는 느낌이리라.
이 영화는 기계문명에 짓눌려 있는 도시인들을 잠시나마 공해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했으면서 이 영화가 지니는 테마가 반문명적이라는데 나는 지지를 보낸다.
꼽추 청년은 도시의 공무원 생활이 싫어 농사를 택했고, 그의 딸 마농 역시 도시의 문명을 배척하고 산 속의 양치기 야성녀를 택한다. 과부가 된 마농의 어머니(엘리자베스 드파르디유분)의 도시생활도 감독은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이같은 클로드베리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같다.
내가 10년 전에 만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의 오대산 계곡들과 프로방스 산악을 비교해 보고, 야성미 넘치는 엠마누엘 베아르와 정윤희를 비교해 보면서 정치탈출과 문명의 반대편에 섰던 때를 생각하며 클로드 베리에게 동감을 표시한다. 정진우<영화감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