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급한 한국 일선 핵심 외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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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상회담의 우리입장/실무협상 난항… 정신대로 국민감정 격양/무역역조 개선할 정치적 결단 요구
한국측은 한일 정상회담의 의외로 국민감정을 자극하고 있어 「성과없는 회담」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당초 양자문제에서 정무부문에서 정신대문제,경제부문에서 무역역조 문제를 각각 현안으로 초점을 맞춰 성과를 도출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이 앞두고 가진 실무회담에서 일본측은 정신대 문제에서는 전례없이 신속한 양보를 했다. 과거사에 대한 사과의 수준을 놓고도 실랑이를 계속했었지만 미야자와 총리는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이란 표현을 자진해서 내놨고,보상도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할 것을 전제로 약속했다. 이같은 일본측의 태도는 미야자와의 자유주의적 정치양식과 방한선물로 이를 부각시키려는 일본정부의 계산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정부는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미야자와 총리가 방한에 앞서 일본에서 먼저 정신대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혀버려 방한중에 더 이상 진전된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게 됐으며,이 때문에 청와대 당국은 실무자들에게 「외교성과」로 포장하지 않은 점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군다나 당초 한국정부가 가장 절실한 현안으로 부각시키려 했던 무역역조 개선부분은 일본측의 완강한 태도로 아무런 진척이 없는 상태여서 정부를 당혹스럽게 하고있다.
미야자와 총리로서도 취임후 첫 해외순방 이라는 점에서 방한외교를 매끄럽게 치러내야 하는 부담이 있겠지만,한국 역시 사상 최대의 무역적자를 기록하고,국내경기도 침체일로를 걷는등 곤경에 처해 있어 무언가 이 부분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야 하는 부담을 안고있다. 그런데 당초의 경제적 부담에 정신대 문제와 관련한 비난여론까지 겹쳐 이를 무마해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게 됐다.
한국측은 먼저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는 국내적으로 「실태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일본측에도 「상반기중 진상조사 완료」라는 새로운 조건을 실무접촉에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문제는 한국의 대일적자가 지난해 전체 무역적자의 90%를 넘는 88억달러에 이르러,GNP의 3.7%에 달하고 있어 노대통령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되고있다.
정부는 이 점을 중시,정상적인 경제논리만으로 따지다가는 양국 경제에 함께 중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며 정치적 결단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측은 구체적으로 ▲여자용 메리야스등 한국의 대일주종상품 16개품목 관세의 50% 인하 ▲가방·장갑등 13개품목의 일반특혜 관세 한도확대 및 관리제도 개선등 관세장벽과 ▲일부 농산물에 대한 수입수량 규제 철폐,피혁·혁화등 관세쿼타 철폐등 비관세장벽 제거등을 제시했다.
또 이같은 무역역조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기술 이전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한일 산업과학기술협력재단」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측은 여기에 모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실무자들이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초점을 맞춰온 「재단」설치에는 일본도 다소 융통성을 보이고 있으나,임기 1년을 남겨놓은 노대통령으로서는 준비기간만도 그 이상이 걸릴 「재단」보다는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거둘 「성과물」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김진국기자>
◎미야자와 총리 왜 오나/아시아 정치적 주도 위한 회유행보/“한국 적자는 산업구조 탓”개선의지 미흡
『만일 총리가 된다면 첫 방문국을 아시아로 하겠다고 전부터 생각해왔다.』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일본총리가 지난 14일 방한 결단시에서 한 말이다. 16일부터 시작된 미야자와 총리의 한국방문은 이같은 그의 아시아 중시외교를 실천에 옮기는 첫 출발이다. 미야자와 총리는 『노태우 대통령과 새로운 평화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대화를 하고싶다』며 냉전후의 한일 양국관계를 보다 긴밀히 하려는 의욕을 강하게 표시했다.
미야자와 총리는 일본의 안정과 번영이 미일 우호관계,그리고 아시아국가들과의 신뢰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있다. 75년 이후 한번도 한국에 온 적이 없는 그가 일본쪽의 별다른 현안도 없으면서 취임 첫 나들이로 껄그럽기 그지없는 한국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일본이 경제대국에서 정치대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해선 우선 이웃나라 한국부터 다독거려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은 한국에 이렇다할 현안이 없다. 그래서 냉전종식후 새로운 평화질서 구축,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의 협력,한반도문제 등 주로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어하고 있다. 수입선 다변화 폐지,영화·음악등 문화교류,종합상사 영업권,자본시장개방 등은 있으나 문제 제기에 그칠 전망이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은 다르다.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가 되기 위해선 무역역조 개선·기술이전·정신대문제 등 구체적 현안이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무역역조 문제에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 방일때 일본이 미국에 취한 것과 유사한 특별조치를 요구하는등 입장이 강경해졌다.
일본도 이같은 문제가 해결돼야 동반자적이며 미래지향적 한일관계가 가능하다는데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남북한관계·한반도문제·정신대 등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측 요구를 수용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일 무역역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위한 눈에 보이는 조치에 대해서는 일본정부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다며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일본은 한일 무역불균형이 기본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원·부자재를 수입,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한국의 산업구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특효약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복잡한 유통구조나 무역장벽이 없다해도 한국제품은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질이 낮아 소비자가 사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또 한국이 이같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이전을 요구하는데 대해서는 민간보유 기술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일본정부는 다만 민간기술 이전이나 한국제품의 대일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환경개선에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미야자와 총리는 이를 위해 기업인·학자가 포함된 한일 구조조정 위원회를 만들어 미일 구조조정처럼 상호문제점을 협의,개선하자고 제안할 방침이다. 어디까지나 시장경제라는 틀안에서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불만이다.
지난번 부시 대통령 방일때 일본이 미국에서 무조건 자동차 부품이나 상품을 사주기로 한 것처럼 한국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이다.
한편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는 양국간 별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미야자와 총리는 14일 『북한이 핵사찰을 받아들이고 이를 완전히 이행할때까지는 일­북한 국교정상화는 할 수 없다. 남북한 대화진전을 지켜봐가면서 교섭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정신대문제와 관련,미야자와 총리는 과거 일본군이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충심으로 사죄한다고 밝혔으며,방한때 이를 천명할 예정이다. 그러나 개인보상에 대해서는 소송제기까지만 인정,재판결과를 보자는 입장이다.
개인보상 실시,전모발표요구 등 최근 한국 분위기를 감안,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주목된다.<동경=이석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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