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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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엄마에게 남자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내게 남자 친구가 하나 생겼기 때문이었다. 글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하는 앤데, 공부는 잘하니? 시간은 잘 지키고? 집안은 어때? 걔 아빠가 엄마한테 잘 해준다니, 엄마를 때리거나 그런 일도 없고? 이담에 커서 뭐가 된대?"하고 정신없이 묻다가 내 설명을 들으면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고는, "걔보다는 저번에 너에게 사귀자고 했다는 걔가 낫지 않니? 걔가 사람이 좋아보이더라. 의젓하고 장래성도 있어 보이고, 그런 애는 나이가 들어도 성실할 거야. 남자는 우선 성실해야 해" 할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대꾸하곤 했었다.

"엄마 지금 뭐 사윗감 골라?"

그러면 엄마는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아니 뭐 그래도…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리 엄마와 아빠가 스무 살에 대학에서 만나 다른 사람하고는 데이트 한번 안 해보고 결혼했다 해도, 엄마가 내 남자친구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곧 결혼이라도 해야 될 것처럼 구는 바람에 나는 그만 엄마에게 남자 이야기라면 일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남자친구 이야기가 나오면 아주 진보적 여성이라는 듯이, "절대로 한번 잤다고 결혼하면 안 된다"란 말을 했다. "요즘 그런 애가 어딨어?" 내가 대꾸라도 할라치면, "뭐야? 그럼 결혼도 안 할 거면서 잔단 말이야?" 이렇게 말을 옮겼다가 내가 무슨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달래기 위해 약간 교활한 목소리로 "함부로 몸을 주면 안 돼. 몸은 마음처럼 똑같이 소중한 거니까. 절대로 함부로…그러면 안 된다. 응?"하며 지독히 보수적인 아줌마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던 엄마도 요즘엔 눈치가 늘었는지, 내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엄마 너무나 멋있는 애를 봤어"하고 말하면, "너 지금 걔가 네가 반한 98번째 아니니?"하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면 나도 지지 않고 "아니야 104번째야"라고 말했다. 그러면 엄마는 "사귀자고 해봐. 어차피 한 달 만에 헤어질 거 아냐?"하고 반격을 해댔다.

내가 굳이 엄마가 사는 B시로 온 이유 중에는 나의 복잡한 인간관계들이 내가 자란 E시에 너무 많이 널려 있어서, 라는 것도 컸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도시에서 자라다 보니 저 아이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사귀었던 애, 저 아이는 중학교 때 나랑 사귀자고 했다가 내가 망설이는 동안 내 짝과 사귀다가 지금은 내 친구의 친구와 사귀고 있으면서 다시 내 짝의 중학교 친구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중인 애, 이런 복잡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B시에는 일단 우리 식구 외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이 복잡한 인간관계들을 정리하고, 고요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고3 시절을 맞고 싶었다. 물론 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말이다.

하루는 독서실 가는 길에 이상한 집을 발견했다. 약간 비탈진 곳에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는 집을 보았던 것이다. 분명 3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1층에 '즐거운 서점'이라는 나무 간판이 보였다. 베고니아가 무더기로 늘어진 토분들이 놓여 있고 이태리 봉선화며, 채송화들이 피어 있는 집이 서점이라는 게 너무 신기해서 나는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책을 좀 둘러보다가 엄마의 이름이 씌어 있는 코너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독서실을 가고 오는 동안 그 서점에 들러서 틈틈이 엄마의 책을 읽었다. 어린 시절, 나는 엄마의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한번은 엄마의 동화가 나왔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서점에 가서 엄마의 책을 사왔는데, 며칠 후 내 방에서 엄마의 책은 사라져 버렸다. 아빠나 새엄마에게 "엄마 책 누가 가져갔어요?"하고 물을 수가 없어서 나는 다음날 할머니를 졸라 엄마의 책을 한 권 더 사왔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후 사라지고 말았다. 몇 번이나 기회를 봐서 아빠에게 물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새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건 말하자면 일종의 금기였고, 내가 그 집에 사는 이상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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