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사의여행스케치] 이탈리아 - 베네치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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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는 물이 넘쳐서 앞문으로 들어오기 힘드니깐 뒷문을 이용해 주세요."

베네치아 구시가의 중심에 위치한 마르코 폴로 여관의 직원이 주의를 줬다. 아쿠아 알타. 베네치아 섬이 있는 석호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도시가 한두 시간 동안 물에 잠기는 현상을 말한다. 보통 해수면의 수위가 가장 높아지는 겨울철의 보름과 그믐 때 발생한다고 하지만 많은 양의 비나 해일, 사하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도 작지 않다. 요즘은 지구 환경 변화로 불규칙적이면서 더 빈번하게 물이 차오르는데, 보통 10월에서 4월까지 동절기에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여관에서 나와 도시의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시청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보행자들을 위한 60㎝ 정도 높이의 가설 보행로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자 낮은 지대에 있는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입구에 물이 새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널빤지를 대는 이들의 손길이 바빴다. 베네치아의 주민들에겐 익숙하거나 혹은 지겨운 일일 테지만 이방인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기대가 몽실몽실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날 밤, 베네치아는 물에 잠기지 않았다. 대신 세찬 폭풍이 몰려와 자정 무렵의 산마르코 광장에서 물이 차기를 기다리던 몇몇 여행객들을 얼려 버렸다.

지구의 기상 이변 때문이었을까. 아무 예보도 없었고 전날 같은 대비도 거의 안 돼 있던 다음날 자정 무렵. 늦은 산책길에 심상치 않은 모습을 봤다. 도시의 하수도들이 조용히 역류하며 아메바처럼 골목길들을 적셔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근처의 작은 운하는 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데카 섬에서 바라본 베네치아섬.

서둘러 산마르코 광장(사진)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아아아아! 이런 광경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광장은 수많은 하수도에서 뱉어낸 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비록 10㎝ 정도의 얕은 수심이었지만 바닥 전체가 커다란 거울이 되어 조명을 밝힌 건물들과 푸른빛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때마침 성당의 탑은 고맙게도 자정을 알리는 종을 장엄하게 울려 줬다. 수상버스 정류장 근처의 전광판이 수위를 보여 줬다. 해수면 기준 98㎝ 상승. 한창 겨울 때는 120㎝ 이상 차오른다고 하니 도시의 골목길들이 무릎 높이까지 잠겨 버리는 셈이다.

자연을 정복하고자 했던 베네치아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남겼다. 하지만 자연은 다시 도시를 정복했다. 베네치아는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자연의 재앙이라 하기엔 물에 잠긴 베네치아가 너무 아름다웠다.

오영욱 일러스트레이터·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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