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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교역 바람…화교상권 "기지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빛 바랜 2층 목조건물이 지붕을 맞대고 들어선 거리…. 대문마다 나붙은 붉은색 지방, 음식점 현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홍등,「풍미」「원동공사」「금교백화」등 한자로 쓰인 간판들이 낯선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인천시 중구 선린동 일대에 자리잡은 속칭「차이나타운」(청관)의 풍경. 한때 1만여 명의 화교가 상권을 형성, 인천최대의 번화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옛 명성은 역사 속에 묻히고 쇠락의 길을 걷고있다.
이 지역에 중국인 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청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인천항을 개항, 선린동 일대 구릉지 5천여평을 청국지계로 설정한 1883년부터.
그로부터 3년 후 주한총리로 부임한 원세개를 따라 들어온 동순태·인합동·지흥동·차화창·동순동 등거상(거상)들이 이곳에 대형 점포를 개설하면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 화교학교·화교협회 등이 활용하고있는 청국 영사관 앞길은 여관(객잔)·잡화상· 음식점·이발관·목욕탕·주택 등이 즐비하게 들어섰던 중심가.
이 지역 화교들은 1937년 중일 전쟁으로 상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중국인 특유의 끈기와 상술로 상권을 장악, 선린동 외에 인근 내동·경동 일대까지 진출, 10여개 대형점포를 개점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짱크」라고 불리는 독특한 모형의 검은색 돛단배로 산동 지방에서 소금·고추·갑곡·지물류 등을 들여와 팔고 건어물·해삼·조개살 등 해산물을 본토로 들여가는 무역으로 돈을 빌었다.
조선말기인 1890년대 이 지역 거주 중국인은 인천시 전체인구(5만6천명)의 l6%인 1만여 명.
그러나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후 중국인들은 하나둘본토로 귀향, 해방 직후는 5천명으로 줄었고, 현재는 1백60여 가구 7백여 명이 잔류, 명맥을 잇고있다.
이에 따라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서울의 미식가들이 몰려들었던 유명한 북경 요리집「중화루」는 20여년 전 문을 닫았고「공화춘」은 빈집으로 쓸쓸히 남아있다.
「풍미」집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버티며 산동지방 고유의 빵인 속칭「공갈빵」을 만들어 파는 원조공갈 빵집이다.
4대째 이 곳에 살고 있는 북성동 제5통장 한정화씨(47)가 부친의 빵 제조기술을 이어 중국식 찹쌀떡인 속이 텅텅 빈 공갈빵과 만두를 만들어 팔고 있다.
『5∼6년 전만 해도 중국사람은 물론 한국사람들도 공갈빵 맛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지요. 그러나 식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손님이 점점 줄어들어 파리를 날리는 실정이지요.』
한씨는『요즘 들어서는 명절 때나 길 흉사 때 화교 대상으로 빵을 만들어 공급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인천시는 88올림픽을 전후 해 이 지역 중국인 촌을 관광명소로 가꾼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약2백억원의 예산을 투입, 전통중국음식점·한약상가·중국전통문화관 등이 들어선 거리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예산확보가 어려워 지금까지 진전이 없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한중간 항로가 개설되고「골든브리지호」「카페리 천인호」등이 취항하면서 선린동 중국인 촌에는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
원동공사(대표 범연강·33)등 무역상들이 하나 둘 문을 열어 중국의 차·의류·기념품·약재 등을 수입하고 한국의 옷·담요·카핏 등을 수출하며 거상의 꿈을 키우고 있다.
원동공사대표 범씨는『대구에서 태어나 일본유학 후 귀국, 한 중 교역바람을 타고 무역상을 차렸다』며『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청관번영회를 결성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김정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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