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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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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용택 시인도 '봄날'이란 시에서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 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고 했다.

봄물은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날씨가 따뜻해진 봄에 얼음과 눈이 녹아 흐르는 찬 물이다. 정서적으로 보는 봄물은 이보다 울림이 사뭇 크다. 얼었던 대지를 적시고 만물이 기운을 더하도록 만드는 생명의 신호와도 같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봄물은 문인들이 즐겨 읊던 소재였다. 남당(南唐)의 마지막 군주인 이욱(李煜)은 975년 나라를 빼앗기고 송(宋)에 항복한 뒤 포로가 됐다. 고국이 있는 난징(南京) 지역을 그리며 읊은 '우미인(虞美人)'이라는 사(詞)는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달 뜨는 밤, 봄바람 찾아오는 유폐지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그대 슬픔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온 강의 봄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듯하네(問君能有幾多愁/ 恰似一江春水向東流)."

슬픔이 봄물처럼 흘러간다. 그런데 그 슬픔은 강 전체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하나라는 뜻의 '일(一)'이라는 글자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지만 여기서는 전체를 뜻한다. 슬픔의 경계가 무한으로 커진다. 모든 것을 부풀리는 봄물의 상징성과 강물 가득하다는 크기의 형용이 섞여 큰 공명(共鳴)을 주는 대목이다. 대만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덩리쥔(鄧麗君)은 이를 노래로 불렀고, 빼어난 가창력 덕분에 중국권에서는 모르는 이 없을 정도의 가요가 됐다.

봄물은 이렇게 감정의 의탁(依托)이 쉬운 대상이다. 때론 생명의 환희를 주기도 하고, 애절한 사랑의 깊이를 견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할 수 있다.

이 얼음 녹는 물이 요즘엔 무섭다.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북극에서 녹아드는 빙산이 장난 아니다. 10년 주기로 3~4% 줄어들었던 빙산이 21세기 들어서는 8%로 많아졌다. 올해에도 북반구에 봄이 다가오면서 해빙기에 접어든 북극의 빙산은 더 빠르게 녹아내릴 전망이다. 남극의 빙벽도 마구 무너진다. 화석 에너지 과소비가 낳은 지구 온난화가 주범이다. 공해와 자원 낭비라는 단어를 떠올려야 하는 얼음 녹는 시절. 이 봄이 참 스산하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