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잡아 보이는 한국/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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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권을 둘러싼 암투로 날이 지고 새는 것을 보고 경제인들은 「이놈의 세상」이라고 욕설한다. 이말속에는 불특정 다수의 정치인에 대한 한탄과 원망이 몇겹으로 쌓여 있다.
그저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 「경제위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권력의 뒤안길에서는 경제야 죽이 되든,밥이 되든 알바 아니라는 입장인듯 하다. 한국정치는 권력다툼이 있을 때마다 늘 경제를 배반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탕아가 본처에게 돌아오듯 경제에 의지했다.
○아세안서도 푸대접
요즘 해외출장을 다녀온 일부 기업인들의 코가 쑥 빠져있다. 한국인에 대한 외국의 푸대접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한다. 아세안국가에서마저 한국에 대한 인식이 아주 나빠졌다.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유통업체관련 총회에 참석했던 한국기업인들은 회의장 말석에 겨우 자리잡았으며 상담도 한번 갖지못했다. 한국상품은 더이상 볼게없다는 현지의 「선입감」 때문이었다.
태국의 한 세미나에 얼굴을 내밀었던 어느 사장은 한국이 아세안국가의 관심밖으로 밀려난데 대한 심한 고독감을 이기지 못해 귀국일자를 앞당겼다.
옛 한국의 왕은 중국이 임명해 왔다고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온 싱가포르에서도 대한 신인도가 더 낮아졌다. 한국은 정치가 늘 불안하고 경제발전은 실속이 없으며 특히 경제에 대한 이해와 의식수준이 전근대적이어서 컨트리리스크(국가별 신용위험도)도 생각보다 높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그만큼 한국기업인의 해외활동이 위축되고 한국정부의 위상도 깎이고 있다.
우리는 외국 기업들이 한국정부에 떼를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드는 현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데 주목해야 한다.
정치권이 정부를 통제하고 때로는 경제활동의 방향타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생리를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떼를 써라,그러면 들어줄 것이니라」라는 어구는 외국기업들의 대한국정부 접촉활동에서 터득된 것이다.
최근 주한 미국대사관은 우리나라 외무부·재무부 등에 미 BOA 서울지점의 불건전한 영업행위를 처벌하지 말도록 「요청」해왔다. 미은행측은 달러를 팔아 높은 금리장사를 해놓고서도 이를 속여왔다.
프랑스 대사관은 엥도수에즈은행의 변칙 환거래를,캐나다대사관은 노바스코시아은행의 변칙영업이 각각 한국의 관계규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항의해 왔다.
미·유럽계의 기업들은 지금까지 공정한 룰을 지켜가며 한국내에서 영업해 왔다. 대개의 다국적 기업들은 그들이 변칙영업을 했을때 한국정부가 관계규정을 들어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면 그 내용에 곧 승복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정부나 정치권이 필요에 따라 룰을 제쳐놓고 「특별히 잘 봐주는데」 그만 길들여졌다. 그뒤로 다국적기업들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관련부서의 담당직원을 찾아가 소명하기 보다는 장·차관이나 정치권의 실력자를 만나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한국정부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체득했다.
○「특혜」에 길들여져
주한외국기업들이 탈세조사나 세무조사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만하면 관련국가 대사관들이 자국기업이 받게될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국정부에 「떼쓰기 작전」을 벌인다. 외국기업들은 한국정부의 「무원칙한 행정」을 깊이 연구해 다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외국의 제약·석유화학·전자회사들은 한국정부의 행정 어디에 구멍이 났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들의 치밀한 두뇌와 정보는 한국을 앞서간다.
지난 80년 미 걸프사는 유공의 지분을 매각,철수하면서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갑자기 재고자산 평가방법을 바꾸었으며 당시 미 언론까지 합세해 정권기반이 취약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리는 방법으로 감세전략을 폈다.
최근 몇년동안 미국에 있는 한국 현지법인들은 미 국세청으로부터 힘겨운 과세조치를 받았으나 우리의 「저항력」은 너무 여렸다.
이제 국내 거의 모든 시장이 열렸으나 정부는 이를 충분히 관리할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윗사람부터 일방향성 사고의 틀이 깨지지 않으면 효과적인 대응을 기대할 수 없다.
한국정부는 왜 얕잡아 보이는가. 우리들은 우리 일을 처리하는 어떤 원칙에 철저하지 못하다. 미국이라 해서 봐주고,일본이라 해서 시간을 끌고 하는 방식에 젖어 있다.
○원칙없는 국가행정
우리나라 영해를 자주 침범하는 중국 저인망어선은 이미 나포됐어야 했다. 외교관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대중무역에서 계속 차별대우받아온 정부가 추측대로 양국 수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봐 불법어로를 그대로 보아 넘겼다면 이는 지나치게 굴욕적인 것이다. 또 해경 경비정은 우리 영해에서 고기를 잡고있는 중국어선을 향해 「어서 돌아가시오」라고 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몸짓이다.
지금까지 북한 간첩들의 남한잠입을 막는데만 전념해온 탓으로 외선의 영해침범정도는 가벼운 사안으로 여겨졌다면 이것은 정말 굉장한 사건이다. 중국도 이미 한국 다루기를 터득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늘 원칙을 좇고 있다.
한국이 나라가 적다고 해서 얕잡아 보이는 것이 아니며 중국은 나라가 크다고 해서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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