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박헌영-김일성 5차 회동(1)|「좌우합작」문제 막판 절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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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박헌영은 서울로 되돌아간지 나흘만인 46년7월말 다시 평양에 모습을 나타났다. 김일성과의 다섯 번째 회동을 위한 것이었다.
5차 회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45년10월의 1차 박·김 회동부터 시작된 공산계열의 권력장악 작업이 박-김의 스탈린 면접에 이어 5차 회동에서 사실상 마무리 됐기 때문이었다.
이 회동을 계기로 북에서는 북조선 노동당이 유일 집권당으로 등장하는 길이 마련됐다.
남에서는 분산되어 있던 좌익계 정당이 남조선노동당의 이름아래 단일세력으로 뭉친다는 정치 일정이 마련돼 적어도 정권창출 투쟁을 위한 전열은 정비됐다. 김일성 입북 10개월만이었다.
평양은 자연스럽게 남한정국의 대응전략을 논의하는 기지처럼 돼갔다.
스탈린에 의해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지명된 시점을 계기로 긴급 현안의 논의나 조정, 전략수립은 거의 평양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북한은 안정된 반면 남한의 정세는 그 반대라는 점에 대한 반증이기도 했다.
박의 5차 평양방문은 4차 방문기간 중 거론은 됐지만 매듭을 짓지 못했던 문제들의 결론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무리 수순이었다.
논의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합당문제였고 다음으로 여운형 및 좌우합작에 대한 입장조정, 미군정의 공세에 대한 대응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들 문제는 4차 방북에서 대개 기본적으로는 논의를 거친 것이었으나 문제의 민감한 성격에서 비롯되는 논쟁은 피할 수 없었다.
5차 방북에 대한 전 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의 증언.
『박헌영의 방문기간 중 두 차례에 걸쳐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의원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 주로 논의된 것은 합당문제, 정 판사 사건문제, 단독정부 수립문제, 좌우합작문제, 박 이 제기한 미군정에 대한 강경 대응 문제 등이었습니다.
합당 사업과 관련한 남북공산당의 긴밀한 협조와 연락을 위한 협의기구구성문제도 논의됐습니다.
먼저 본격회의에 앞서 4차 방북 때 논의는 됐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정 판사 사건에 대한 정식보고가 제출됐고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됐다.
서씨의 증언.
『정 판사 사건의 경과는 물론 당시 남한에서 발표된 것과 전혀 다르다고 보고됐죠.
보고 내용은 이랬습니다.
「일제 때 서울 중부경찰서 고등계 형사를 했던 한 사람이 근택빌딩에 지폐를 찍어내던 원판과 용지가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아낸 뒤 내부의 평판공들을 매수해 이를 홈쳐냈고 이를 이용, 뚝섬에 인쇄소를 차려 위조지폐를 찍었으나 미군정이 공산당의 인쇄물을 취급하던 정 판사에 뒤집어 씌웠다」(지금까지 알려진 사건 진상은 91년 12월23일자 27회 참조).
상무위원회의는 이 보고를 받아 들여「정 판사 사건은 미군정이 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미군정이 당시 남한 정치판에서 영향력이 큰 민주주의 민족전선(좌익계열 공동전선, 이하 민전)을 파괴하기 위해 민전에서 중심역할을 하는 공산당을 집중 탄압하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상무위원회의는 정 판사 사건의 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재판 때 공판투쟁을 벌인다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이 문제는 이견이 없었지만 좌우합작은 달랐다.
4차 회동 때 김일성과 박헌영의 토론에서 드러났던 인식상의 차이가 다시 드러났다.
먼저 좌우합작의 주역인 여운형에 대한 박헌영·김일성의 생각 차이가 다시 반복됐다.
당시 여운형이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하고 있어서 이 문제는 중요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4차 회동 때처럼 논란을 벌였다.
여운형에 대한 개인적 견해나 남쪽의 좌우합작을 보는 박헌영의 입장과 김일성의 그것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씨의 증언.
『먼저 김일성은「신문을 보니까 여운형의 생각이 미군정을 따라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지지성 발언을 했지요. 그러자 박헌영은 여운형에 대한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좌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 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좌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 지주 출신이다.」
북조선 공산당 내의 일부 간부들도 박의 견해에 동조했었습니다.
박헌영의 태도에 대해 난감해진 김일성은 할 수 없이 속생각을 비췄죠..
내가 석달 전 여운형을 만나봤는데 박헌영 동지의 평가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라 해도 동의하기는 어렵다.
여운형은 일제 때 건국동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도 인민공화국을 만들려 했고 지금은 민전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지 않느냐.
그가 우리와 함께 통일전선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만들려 하는데 그만하면 된 것이 아니냐. 이 양반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더라도 공산당과 인민당이 같은 민족통일전선에 들어가야 된다고 밝히고 있지 않느냐. 당이 서로 다르더라도 당면 강령과 투쟁목표가 같은 게 증거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박·김의 의견이 다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운형을 야심가로 치부하고 접촉을 꺼린 박헌영과 달리 김일성은 여운형과 비밀접촉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이 좌우합작에 대한 여운형의 명백한 입장을 알게된 것은 모스크바 방문직전 여운형에게 밀파한 고위 정치공작원 성시백을 통해서였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김책을 통해 성시백을 다시 서울로 내려보내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성은 서울에서 비밀리에 여운형을 만나 그의 편지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여운형은 이 편지에 좌우합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편지내용은「좌우합작을 발전시키고 미군정의 영향력을 점차 감소시켜 독립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시백은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친서를 보여주었고 다시 46년 7월말 서울로 밀파돼 김일성의 답서를 여운형에게 전했습니다.
이같은 비밀연락은 북조선공산당의 대남 연락 부문만 관련된 극비였고 박헌영이 알 수가 없었지요.
김일성은 김일성대로 좌우합작이 자신의 정치노선인 통일전선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여운형은 여운형대로 김일성과 접촉할 필요성을 느꼈던 셈입니다.』
북조선 공산당은 박헌영이 모르는 독자적인 대남 창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과 여운형은 서신 교환 외에도 이미 상당 수준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북한부-특별 취재반>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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