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쿠웨이트서 허종 북한 대사 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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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를 국빈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27일 새벽(한국시간) 바얀궁에서 열린 국왕 주최 만찬장에서 허종 주쿠웨이트 북한 대사와 악수하고 있다.쿠웨이트시티=안성식 기자

쿠웨이트를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27일 오전(한국시간) 북한 대사를 만났다. 사바 알 아메드 국왕이 주최한 만찬 행사 때 허종(61)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와 깜짝 만남을 가졌다.

사바 국왕은 만찬에 아시아 지역 대사를 모두 초청했다. 만찬 전 대형 접견장에서 노 대통령과 사바 국왕은 참석자들을 차례로 영접했다. 노 대통령이 쿠웨이트 측 인사들과 악수를 하던 중 허 대사가 입장했다.

▶허 대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입니다.

▶노 대통령=(조금 놀라는 표정으로 악수와 함께 왼손으로 허 대사의 오른팔을 감싸며) 아하, 반갑습니다.

▶허 대사=대단히 반갑습니다.

▶노 대통령=(낮은 목소리로) 가시거든 전해주세요. 진심으로 합니다.

▶허 대사=(악수를 하고 있다가 왼손으로 노 대통령의 손을 감싸며) 감사합니다. 성과를 바랍니다.

만남은 2~3분여에 불과했다. 하지만 목적어 등이 생략된 "진심으로 합니다" "성과를 바랍니다"와 같은 함축적인 발언이 남기는 여운은 길었다.

윤승용 청와대 홍보수석은 "'진심으로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가 진심으로 남북 관계와 대북 정책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한 지도부에 전해달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수석은 "허 대사가 만찬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노 대통령이 미리 알았다"고도 했다. 그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쿠웨이트 측에서 아시아권 대사들을 초청해 이뤄진 만남"이라고 했다.

노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에 북한 대사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2005년 9월 10일 멕시코 방문 당시 대통령궁에서 열린 국빈 만찬 때 노 대통령은 서재명 멕시코 주재 북한 대사를 만난 일이 있다. 하지만 북한 대사가 한국 대통령과 만날 것을 미리 알고도 만찬에 참석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특히 시점이 주는 의미가 크다. 하루 전 노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동포 간담회에서 "앞으로 대한민국이 살자면 친미도, 친북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보통 외국 주재 북한 대사들이 한국 대통령을 만날 때는 본국에 사전 보고하는 것으로 안다"며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해빙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2005년 9월 노 대통령이 멕시코 주재 북한 대사를 만난 지 9일 만에 9.19 공동성명이 타결됐다.

한나라당은 이를 남북 정상회담과 연관지었다. 김성조 전략기획본부장은 "'진심으로 합니다'고 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정부의 대북 정책을 두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며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심재철 홍보기획본부장도 "10%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면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 테고 대통령은 이걸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쿠웨이트시티=박승희 기자 <pmaster@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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