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입맛 따라 휘두른 출판 탄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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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0년대 출판탄압의 유형은 상상밖으로 다양하고 시기별로도 뚜렷한 특징을 갖는다.
우선 탄압의 유형을 정리해 보면 출판사에 대한 탄압과 도서유통에 대한 탄압으로 대별된다.
출판사에 대한 탄압의 형태는 ▲원고 등의 사전검열 ▲내용수정 요구 ▲세무사찰 ▲압수 수색 ▲출판인의 불법연행·장기구금·구류·구속 ▲출판사 신규등록규제 및 등록취소 ▲출판금고 대출규제 등 법을 스스로 무시하면서까지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도서유통에 대한 탄압의 형태는 ▲납본필증 미교부 ▲출판사에 대한 시판중지 요구 ▲서점에 대한 시판중지 종용 ▲서점에 대한 압수수색 ▲서적상의 불법연행 등 인신 구속 ▲광고기회의 봉쇄 등이다.
시기별로 보면 80년대 전반은 출판사에 대한 탄압에만 초점이 모아졌으나 85년5월을 기점으로 서적상 등 도서유통에 대한 탄압으로까지 폭을 넓혀갔다.
간행물 내용의 사전검열은 87년5월말까지 6개 출판사를 대상으로 여섯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82년12월 문공부 간행물심의실은 도서출판 석탑이 발간한 『사회과학 강의』(수전양 지음) 에 대해 발행인 최영희씨를 호출, 시판중지 각서를 요구하면서 『책 한 종이 판금되면 제작비 5백만원 정도의 경제적 손실을 입지 않는가, 그러니 원고나 교정지 상태로 사전심의를 받아 피해가 없도록 하는게 좋지 않겠느냐』며 앞으로 책을 낼 때는 미리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협조라는 미명하에 실질적인 사전심의나 검열을 기도한 경우다.
내용수정 요구는 수없이 많다. 86년 문공부가 작성, 발표한 6백79종의 「문제도서 목록」중 비고란에 「수정삭제」 「19××년×월×일 이후 발행분은 가」라고 표시된 책들은 모두 포함된다.
세무사찰도 3개 출판사에3회에 걸쳐 실시됐다.
도서출판 사계절은 85년10월『임거정』 (홍명희 지음) 의 재고와 지형을 압수 당하고 「절대 시판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강요받은 데 이어 86년1월 기습적인 세무사찰을 당한 끝에 거액의 벌과금과 추징금을 물었다.
80년7월 『창작과 비평』 『월간중앙』 등 1백72종의 정기간행물이 강제 폐간 당한 이후 5공 7년 동안 창간된 월간 종합지는 81년 계몽사에서 낸 『마당』이 유일하고, 잡지 판권의 명의 변경을 승인해준 것도 83년 『세대』를 인수, 이름을 바꾼 『월간조선』 하나 뿐이다.
이 두 잡지의 출현은 진보적 종합지에 목말라하던 당시 독자들의 요구를 5공이 못이긴 결과다.
그러나 월간 종합문화지로 선보인 『마당』 은 엄청나게 넓은 시장성에도 불구하고 정치물을 다루지 않겠다는 당국과의 약속을 지키다 독자들로부터 외면 당해 3년 뒤 치욕적인 자진폐간의 길을 걷는다.
또 87년 10월까지 7년간 서울에서의 출판사 신규등록의 길이 사실상 막힘에 따라 영세한 출판인들은 2중의 고통을 받는다.
출판사 신설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기존 출판사를 인수할 경우 등록증에만 3백만∼4백만원의 프리미엄이 붙었고, 편법으로 등록은 지방도시에 하고 제작·영업은 서울에서 하려니 사무실 유지비가 2중으로 들었다.
이를 두고 도서출판 거름 대표 유대기씨는 『5공이 영업의 자유를 봉쇄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기본원리를 스스로 부정한 셈』 이라고 비판했다.
출판사·서점을 압수수색 하는데 이용된 법률은 주로 경범죄처벌법. 이 법은 제4조의남용금지 규정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사로 악용됐었다.
한국 출판문화운동협의회는 82∼87년 5년 동안 수색은 28개 출판사에 40회에 걸쳐 했고 압수된 책은 약7만부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서점들에서 압수된 부수는 제외).
권력측에 호의적이거나 유리한 전달매체는 헌법이 보장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보호받게 마련이므로 헌법에 보장된 출판의 자유란 정부나 권력에 대한 비판물을 그 대상으로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헌법에 보장된 출판의 자유는 경범죄처벌법·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국가보안법 등 하위법들에 의해 사실상 형해화됐던 것이다.
경범죄처벌법과 함께 무소불위로 휘둘러진 칼이 국가보안법.
『한국 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집필 혐의로 구속된 이재화씨는 90년 초 열린 공판에서 담당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쓴 역사책이 사실을 틀리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적행위가 되는 것인지, 사실은 맞는데 알려서는 안될 사실을 알려서 이적행위가 되는 것인지를 밝혀 달라.』
이에 대해 담당검사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이적행위』 라고 답변하여 방청객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5공시절 한 판사의 판결문은 검사의 공소장의 틀린 글자까지 그대로 베껴놓아 빈축을산 일도 있다.
이처럼 책의 내용에 대한 종합적·전문적 이해가 없는 공안담당 판·검사들에 의한 법집행이 국가보안법의 남용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87년 문공부·검찰·경찰 합동의 「판금도서 단속반」이 출판인·서적상들을 무더기로 구속하던 어느 날 텔리비전에 나온 공안검사는『우리도 이런 책들이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대학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이런 책을 문제삼아 출판탄압을 했다고 해서 지탄받을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이런 책은 곤란하다』고 밝혔다.
그날은 너무나 빨리 왔다. 그후 4년도 안돼 이른바 「문제출판사」들은 이념도서 발간을 스스로 포기하고 새로운 출판영역 개척에 앞다퉈 나섰다.
그것은 분명 탄압의 결과가 아니다. 동구·소련 등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실험의 명백한 실패가 부른 시대의 요구다.
「책의 선택은 독자에게 맡겨라」
너무나 상식적인 이 말이 오늘은 천금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최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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