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독 때는 왔다 목소리 높이기|사라진 소 연방 깨진 냉전 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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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소련의 몰락을 계기로 전후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자기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과 독일은 2차 대전을 야기했다가 패전한 추축국으로 전후 전범국이란 오명 속에 국제사회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2등국으로서 위치를 감수해왔다.
승전국이 중심이 된 국제사회가 이들에게 준 정치·군사·외교적 제재, 전후복구라는 당면과제가 이들 국가의 영향력과 활동영역을 제약해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동구 공산권의 변화와 소련의 몰락, 이로 인한 냉전구조의 해체와 경제중심으로 변하기 시작한 국제관계가 이같은 제약들을 거두고 있다.
또 이들이 전후 이룩한 경제성장은 과거와는 달리 이들의 역할증대를 요구하기까지 하고있다.
이같은 국제사회의 요구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이들의 발언권도 커지고 있고 발언권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두 나라의 움직임도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두 나라는 최근 들어 국제 정치·경제문제에서 과거 전승국들에 고분고분하던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무역문제에서 양보를 요구하는 미국에 『그것은 너희문제』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또 미국의 요구에 걸프전비를 부담하고 외국원조정책에 동참하고 있으니 점차 그에 상응한 정책결정에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이와 아울러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대규모 경제협력 및 투자를 통해 아시아를 일본의 경제권으로 흡수하면서 이를 대미 무역·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돈이 급한 소련에 대해서도 경제협력을 원하면 북방4개 도서를 반환하라고 요구한다.
소리는 크지 않지만 2차 대전 전승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에 무언의 경제력시위를 하고있는 셈이다.
독일의 태도변화는 일본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공화국 승인문제를 둘러싸고 유럽과 미국, 그리고 유엔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켰다.
독일은 이어 다른 나라 움직임에 관계없이 크리스마스전 승인이란 방침에 따라 23일 두 공화국을 승인했다.
이같은 독일의 독자성과 강화된 발언권은 통일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외교행태로 지적되고 있다.
독일은 또 경제문제에서도 강력한 독자성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다른 EC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이자율을 올린 것이다.
프랑스와 다른 유럽국가들은 독일의 이같은 조치에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크화의 위력이 무시될 순 없기 때문이다. 유고의 두 공화국에 대한 승인과 이자율인상에서 보인 독자성은 독일이 외교·경제분야에서 그 지도력과 영향력을 테스트한 모델로 지적된다.
콜총리와 겐셔외무장관은 두 조치에 대한 유럽국가들의 비난의 우려에 대해 『유럽이 힘의 공백을 피해야 한다』며 안정세력으로서의 독일의 역할을 숨기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독일의 이같은 움직임은 유럽통합조건으로 독일이 주장하고 있는 새 유럽안보체제·공동외교정책·공동화폐 제도가 독일주도의 유럽구도를 염두에 둔 것이란 우려를 유럽국가들 사이에 자아내게 하고 있다.
독일은 통일과 최근 소련의 붕괴로 외교관계에서 확신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되고있다.
일본과 독일은 일본주도이긴 하지만 유엔안보리에서 거부권을 갖는 상임이사국에 자신들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걸맞는 영향력과 목소리가 보장되어야한다는 논리다.
이들의 주장은 안보리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련과 중국이 냉전의 종식과 경제관계로 변하고 있는 국제관계에서 국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더 큰 설득력을 갖기 시작하고 있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나 소련의 붕괴와 함께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향력과 목소리를 높이려는 일본과 독일의 움직임이 앞으로 국제관계나 세력균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뉴욕=박준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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