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웃음 짓다가, 눈물 훔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 혼자 웃다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동네 우물에 부었다/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를 저었다//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삼학년')

열 살 꼬마 녀석의 (딴에는 치밀한) 계산에 따르면, 그 맛나는 미숫가루를 실컷 먹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수단은 동네 우물에 미숫가루를 통째로 붓는 것이었다. 열 살 꼬마의 깜냥으론 최선의 방법이었을 터. 하나 어른들은 비정했다. 일방적으로 몹쓸 말썽이라 판정해 버렸다. 기분이 좋아지는 시다. 얼굴에 반질반질 때가 앉은 개구쟁이 녀석이 요 앞에서 씩 웃는다.

'제 맛이 날 때까지 오줌장 익혀서/호박넝쿨, 가지, 고추에게 먹일 거란다/오줌 보탤 것 아니면 뚜껑 닫으라 한다/술독도 아닌데/아카시아꽃잎이 띄워진다.'('장독'부분)

어느 날 평상 뒤에 투박한 장독 하나가 놓여있어 용도가 궁금한 참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어머니가 엉덩이 까고 장독 위에 앉아있는 게 아닌가. 장독에 왜 오줌을 누냐 묻자, 어머니는 채마밭에 뿌릴 터이니 오줌 보탤 거 아니면 얼른 뚜껑이나 닫으라 되레 성화다. 된장, 고추장처럼 오줌장이란다. 자꾸, 웃음이 비어진다.

# 혼자 울다

'모질이 새신랑 가늉이가 할 수 있는 일은/밥 먹고 똥 싸는 일 말고 한 가지가 더 있어/갓난아이 울음소리가 오두막을 들썩이게 했다//쌩긋쌩긋, 심삐댁은 갓난아이 업고 나타나/마을잔치 내내 설거지를 도왔다//사뿐사뿐, 정골 오두막으로 돌아가는/심삐댁의 손에는 떡 보자기가 들려져 있었다//인절미 챙겨주던 정양골할매가 목놓아 울던 밤,/지들이나 처먹지 지들이나 처먹지/찰떡 같은 달이 목메게 차올랐다//심삐댁은 젖은 베개 달래어 젖을 물렸다'('오두막'부분)

옛날 시골엔 꼭 모자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인의 마을에도, 외딴 오두막에 가늉이와 심삐댁 내외가 살았다. 동네에서 식은 밥이며 김치쪼가리 따위를 얻어먹었다. 삼신할머니는 본래 공평하신 분인지라, 가늉이 내외도 아이를 가졌다. 갓난아기 업은 심삐댁, 생긋 웃으며 마을잔치 설거지를 도왔다. 심삐댁 일하는 모양이 기특해 정양골할매가 인절미를 챙겨준 게 그만 화를 불렀다. 모처럼 얻은 귀한 음식이기에, 부모는 모처럼 얻은 귀한 아기에게 먹였다. 찰떡같은 달 차오른 밤, 아기 잃은 엄마는 눈물로 젖은 베개에 젖을 물렸다.

시인은 아기가 죽었다고 적지 않았다. 장마에 떠내려간 아이와 농약 들고 아이를 따라간 아버지의 사연을 담은 시 '장마'에서도 시인은 '죽었다'고 적지 않았다. 굳이 드러내놓지 않아서, 넌지시 일러주고만 있어서 시는 더 시리다.

이 시가 뭐 그리 새로우냐, 옛날 얘기를 시로 옮긴 건 미당의 '신부(新婦)'도 있지않느냐, 이리 따질 수도 있겠다. 정히 그러고 싶으면 그리하시라. 하지만 울컥, 치받는 기운 없었다곤 말하지 마시라. 시 앞에선 혼자 울어도 된다.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