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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3년] 한국·칠레 FTA … 득실 따져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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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04년 2월 16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농민들이 집어던진 쌀가마와 빈 병으로 국회는 쓰레기장 같았다. 농민들은 이날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한다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국내 포도.복숭아 농가는 모조리 망할 것이란 주장이었다. 이런 격렬 시위를 뚫고 국회는 이날 건국 이래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인 한.칠레 FTA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후 3년. 과연 농민들 주장대로 국내 포도 농가는 망했을까. 농림부에 따르면 국내의 시설 포도 재배 면적은 2003년 1412ha에서 2006년 1636ha로 오히려 16%가량 늘었다. 가격도 10%가량 올랐고, 생산량도 소폭 늘었다. 국내 포도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칠레산 포도에는 11월부터 4월까지만 관세를 낮춰주는 계절관세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칠레산 포도 수입은 대부분(70%)이 이 기간 중에만 이뤄졌다. 국내산이 시장에 나오는 5~10월에는 사실상 칠레산 경쟁자가 사라진 것이다. 국내 소비자들의 선택 폭도 넓어지고 국내 포도 농가도 타격을 입지 않는 윈-윈 시장 개방이 이뤄진 셈이다.

◆ 한국 자동차, 칠레서 약진=제조업은 더 큰 효과를 봤다. 칠레 산티아고 현지는 베르나와 클릭 등 현대차로 가득 차 있다. 25일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차의 칠레 수출량은 4만9925대로 전년보다 6000대 이상 늘었다. 원화 가치가 급격히 오른 반면 엔화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세계 곳곳에서 일본차에 밀려 한국차가 고전했지만 칠레에서만은 예외였던 것이다. 한국차의 시장 점유율은 2006년 25.7%를 기록 중이다. FTA 발효 전 18.8%로 일본차에 크게 뒤졌던 한국차가 이제는 일본차(26.1%)를 추월할 기세다. FTA 발효 후 3년간 연평균 증가율은 휴대전화가 108%를 기록했고, 자동차(52%).컬러 TV(24%) 등도 급속히 칠레 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다.

◆ 무역적자 늘었지만 실속은 챙겨=무역적자는 늘었다. 한.칠레 FTA 발효 1년 전(2003년 4월~2004년 3월)에 8억 달러 정도였던 대(對)칠레 무역적자는 발효 3년차(2006년 4월~2007년 2월)에는 22억 달러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는 칠레 수입의 80%를 차지하는 구리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발효 전 t당 660달러였던 구리 가격은 현재 7080달러로 10배 이상 올랐다. 구리 등 주요 교역 원자재 가격이 같았다면 FTA 발효 1년 전 8억 달러 정도였던 대칠레 무역 적자는 발효 3년 후 4억 달러로 절반이 줄어든다. 재경부 김동수 경제협력국장은 "FTA 이후 칠레와의 무역에서 실속은 우리가 더 챙겼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 기우로 끝난 국내 농가 피해=돼지고기(125%).포도(109%).와인(321%) 등 칠레산 농산물 수입이 늘어났지만 농가 타격은 크지 않았다. 대부분 미국 등 경쟁국의 수입 농수산물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키위(583%)의 경우 FTA 발효 전보다 수입량이 늘었지만 대부분 기존 뉴질랜드산이 장악한 시장을 잠식했다. 홍어와 돼지고기는 미국(돼지고기).아르헨티나(홍어)의 공세에 밀려 칠레산의 점유율은 오히려 하락했다. 우려했던 농가 몰락 등은 기우로 판명된 셈이다.

당초 정부는 칠레와의 FTA에 따라 가장 큰 피해가 우려됐던 포도.키위.복숭아 농가를 위해 2600억원을 보상금으로 책정했다. 하지만 이후 4년 동안 지급한 보상액은 1만1300여 농가 1445억원에 그쳤다.

포도뿐 아니라 키위의 국내 재배 면적은 2003~2005년 사이 11%나 늘었고, 복숭아의 국내 생산량도 증가했다. 칠레산 농산물 수입 급증으로 가격이 일정 수준 이하로 폭락하면 농가에 현찰로 보상해 주기로 한 소득 보전 직불제도는 한 차례도 발동되지 않았다.

그러나 FTA에 따른 농가 피해를 단정하기엔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있다. 전국 농민회 총연맹 박웅두 정책위원장은 "이미 1만여 농가가 폐업을 했고, 관련 농산물의 국내 판매 감소액이 400억원이 넘는다"며 "칠레와의 농산물 관세는 10년에 나눠 철폐되는 만큼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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