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단편 릴레이 편지] 검정 비닐봉지 실내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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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검정 비닐봉지 실내화

교무실에 들어온 된장잠자리를 내보내고 책을 보고 있는데 캐비닛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온다. 이건 쥐새끼 소리가 분명하다. 나는 막대기를 든다. 놈이 최대한 접근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손아귀에 땀이 찬다. 놈은 학교에 무슨 인연이 있어 이렇게 열심히 출근하시나? 아예, 학교에 숙소를 잡고 사시나?

으라차찻! 몸을 퉁겨 봉을 날리는 순간 놈은 없고, 그 자리에 할머니 한 분 서 계시다. 실내화 대신에 비닐 봉지를 양발에 묶어 매셨다. 선생님이 우리 손녀 담임되시나유? 예. 근데 걔가 잘뭇 헌거는 지도 잘 아는디, 이 늙은 할미를 때리실라구유. 그렇게 혀서라도 선상님 맘이 풀리시먼 워쩔 수는 없는디, 걔도 에미애비 없응께 워디다 맘 못 두고 속을 썩이는구만유. 나는 검정 비닐 봉지를 내려다본다. 눈이 잠자리 날개처럼 부예진다.

엊그제 장터에 내려갔을 때 단감나무 묘목도 제 시린 발에 비닐 봉지를 묶어 매고 있었다. 지가 얼마나 좋은 감나무인지 묘목마다 크고 붉은 감을 매달고 있었다. 다 담임 잘못이지유. 나는 말을 얼버무리고 할머니 볼에 그어진 무수한 바람의 상처를 본다. 저녁의 운동장에 된장잠자리 몇이 떠 있다. 노을이 붉다.

이정록<시인>

◇이번주 단편 릴레이 편지는 시인 이정록(39)씨가 이어갑니다.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씨는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제비꽃 여인숙' 등을 펴냈고 현재 천안농업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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