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야화(28)|4·19혁명|경무대 향한 학생들 총탄에 피흘리며 쓰러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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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960년 4월18일.
그날은 월요일이었고 오후3시부터 신입생 환영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아침에 아무 이상없이 두시간 수업을 끝내고 선생들은 총장부속실에 모여 코피를 마시고 있었다.
11시가 되어 세시간깨 수업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나는 창 바로 밑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밖에서 별안간 마이크로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교정이 떠들썩해졌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왼쪽 언덕위 도서관앞뜰에 마이크를 세워놓고 『학생들은 어서 빨리 인촌동상 앞으로 모여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대나무로 만든 큰 고리짝을 어느틈에 우리들이 앉아있는 창밖으로 운반해와 흰 타월을 하나씩 꺼내 동상 앞으로 달려오는 학생들에게 던져주었다.
서관 오른쪽 골목에서 플래카드를 계속 운반해 와 이것을 펴들고 학생들은 어느틈에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선거를 다시 하라』는 선언문이 낭독되고 플래카드를 앞세운 학생들의 성난 물결이 정문을 향해 몰아쳤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상황을 나는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이 데모가 역사를 뒤바꿔 놓은 4월 혁명의 발단이었다.
교문을 나선 데모대는 먼저 안암동 파출소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4층에 올라가 멀리 파출소 앞을 바라보니 경찰과 학생들이 서로함성을 울리면서 부딪치더니 학생들이 드디어 경찰을 밀고 앞으로 나갔다.
경찰의 저지선과 맞부닥치기를 몇번이나 했는데 그때마다 학생들은 부상자를 내고 후퇴했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돌진, 오후2시에 마침내 목적지인 국회의사당 앞에 도달했다.
의사당 앞에서 데모대는 여러가지 구호를 외치고 국회의 책임있는 답변을 요구했다. 국회대표가 나와 학생들의 의사를 알았다고 말하고, 유진오총장의 훈유로 데모대는 저녁6시쯤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학생들이 교가를 부르며 대열지어 을지로4가를 돌아 종로4가로 들어서는 순간 난데없이 깡패들이 나타나 경찰차가 앞길을 안내하는데 모행렬을 쇠뭉치·쇠갈고리·몽둥이 등으로 마구 때렸다.
경찰은 보고만 있었고 학생들이 많아 부상해 일대가 피의 수라장이 되었다.
부정선거로 국민의 분노를 샀던 자유당정권 악당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깡패를 동원해 애국학생들을 습격, 난타함으로써 스스로 묘혈을 판 것이었다.
다음날인 4월19일, 드디어 시내의 대학생이 총궐기했다.
이날 정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있었다. 그 넓은 네거리가 학생들로 꽉 차 있었고 학생들의 성난물결은 경무대로 경무대로 밀려가고 있었다.
경찰은 겹겹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최루탄·곤봉, 또는 소방차의 물세례로 데모대를 저지하려 했다. 학생들은 돌멩이·벽돌로 대항, 데모는 경찰과 학생들의 싸움으로 되어버렸다.
드디어 자유당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실탄사격을 명령,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굵은 수도관 뒤에 숨어 이것을 굴려가면서 경무대로 향했다. 이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무대 앞에서는 더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데모대는 이와 동시에 정부 기관지인 서울신문사와 경찰서를 습격, 불태워버리고 서울의 큰 거리를 휩쓸어 시내는 수습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었다.
마침내 군대가 출동하고 학교엔 휴교령이 내렸다. 그러나 그날은 밤새도록 데모가 그치지 않았고 수도서울의 치안은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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