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상품이 아니라 시대를 디자인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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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필로디자인 김민수 지음, 그린비, 456쪽, 18900원

디자인의 의미와 역할을, 인물 중심으로 입체적으로 풀어낸 예술-인문 에세이다. 제목은 철학(philosophy)과 디자인의 만남을 뜻하는 신조어로 100년에 걸쳐 시대를 디자인한 명 디자이너 22인의 삶과 철학을 다뤘다.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의 이해는 가히 블랙코미디 수준 같다…대중들은 디자인하면 주로 모 '국민 패션 디자이너의 지난 수십 년 동안 변치 않는 '환타스틱 화숑 디자인'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의 옷은 대중이 유행의 변화에 따라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인 패션과는 거리가 멀다…요즘 TV에 나오는 아파트 광고 속의 주거 공간은 살림집이라기보다는 마치 외국의 사교클럽장을 방불케 한다."

1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심상치 않다. 따라 읽다보면 산업자본주의의 획일성을 벗어나기 위해 미술공예운동을 펼쳤던 영국의 건축가이자 미술가 윌리엄 모리스를 만난다. 시인 찰스 킹즐리와 평론가 존 러스킨의 영향으로 '예술 민주화'를 지향하게 된 인생역정은 물론 그의 주장이 빚어낸 모순도 객관적으로 보연준다. 결국은 고가(高價)의 수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데 치중하는 모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맺는다.

"한국에서 디자인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있는 삶의 방식'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대신 소비자를 현혹하는 상품 치장술 정도의 역할에만 몰두하고 있다…사회적으로 양극화를 부추기는 확실한 전위적 역할 외에 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책이 예쁘다. 디자이너의 작품을 여럿 소개하는 덕도 크지만 편집 자체도 그렇다. 내용은 성찬(盛饌)이다. 바우하우스를 통해 근대 디자인의 규범을 완성한 발터 그로피우스, 건축 에너지를 시적 감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장 누벨, 'I♥NY'로고를 만든 밀턴 글레이저 등 좀처럼 만나기 힘든 대가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한국의 조성룡.안상수도 들었다.

6년의 투쟁을 거쳐 서울대로 복직한 김민수 교수가 작심하고 쓴 듯, 틈나는 대로 한국 디자인의 위치와 지향점을 언급한다. 쉽게 풀어써 디자이너 지망생은 물론 주체적인 소비에 관심있는 이들도 얻는 것이 적지 않을 책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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