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실체 1세기 앞당길 사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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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동의대 박물관에 의해 8일 발굴결과가 밝혀진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가야의 실체를 1세기정도 앞당길 수 있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가야의 국력 및 외국과의 문화교류 형태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돼 관심을 끌고 있다.
양동리 고분군은 모두 6종류나 되는 다양한 묘제로 이루어졌는데 시기별 가야묘제는 토광목곽묘에서 토광목곽묘를 거쳐 수혈식 장방형 석실묘의 3단계로 변화·발전됐음이 이번 발굴결과 확인됐다.
이 가운데 제162호 묘는 대형 토광목곽묘로서 최고의 유구로 밝혀졌으며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3세기말의 것보다 1세기 이상 연대가 올라가는 구야국 내지 본가야의 것으로 보인다.
이 분묘에서는 한경 2면, 방제경 7면이 나왔는데 지금까지 우리나라 고대 분묘에서는 거울이 저명한 분묘, 그것도 1, 2면만이 부장되는것이 일반적이었던 점에 비추어 이 묘의 피장자는 당시 강력한 힘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할수 있다.
피장자의 허리부근에서 출토된 칼 6자루와 다리부근에서 노출된 방패 1자루는 가야고분에서 나온 것으로는 가장 큰것이어서 피장자의 신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거울은 또 칼·옥등과 함께 3옹기로 간주되는 주술적인 것으로 이 묘의 피장자는 주술적인 힘과 정치적인 권력을 모두 갖춘 수장급 신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울 가운데 방제경은 중국이외의 나라에서 중국제를 모방하여 만든 거울을 일컫는 것으로 그동안 방제경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소형의 방제경이 발견된바 있고 이번에도 양동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뤄 한반도에서 방제경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앞으로 방제경의 원류에 대한 연구가 진행돼야할 것으로 보인다. 방제경과 함께 나온 한경은 중국제로 당시 가야가 낙랑을 통해 중국과 연결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이번 토광목곽묘에서 나온 부장품의 특징은 토기는 한점밖에 없고 대부분이 철제품이라는 점에서 이보다 앞선 시기인 토광목관묘보다 월등하게 신장된 정치·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시권력자는 철을 지배하는 인물이었다는 위지동 이전의 철에 대한 기사와 부합되는 것이다.
출토물중 철가마솥은 남한지역에서는 처음나온 북방계유물로 김해지역 가야의 원류가 서북지방이었을 가능성도 시사해주고 있다.
이번 발굴결과를, 종합해보면 우리나라 청동기의 마지막 사용지역이 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남부임을 추정할 수 있으며 종래 막연히 일본청동기로 간주하던 출토지 미상의 자료들에 대한 원류·연대·생산지등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에의 문화전파측면에서도 전기 가야시대에 있어서 한반도문화를 일본에 전수한 주체는 구야국 내지 본가야였으며 김해를 통해 그러한 문물이 흘러들어 갔음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김상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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