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승리자는 누구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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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태평양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이 8일(현지시간 7일)로 50돌을 맞는다. 반세기가 지나 이날을 맞는 미국이 승전국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는 반면 패전국 일본은 경제번영을 구가, 역사적 과오의 반성보다 일종의 축제분위기다. 미일 개전 50주년을 맞는 미국과 일본의 대조적 현실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읽는다.【편집자주】
(미국의 시각)전쟁 이겼지만 경제패배 자성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미일간 태평양전쟁의 최후 승리자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과연 누구인가.
일본의 진주만 공격 50주년을 맞은 미국 언론들은 이러한 질문에 선뜻 「미국」이라는 답변을 유보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등 유력지들은 진주만공격 50주년을 전승가대신 자기반성과 질책으로 채우고 있다.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는 『일본과의 전쟁은 패배』라는 특집프로에서 일본기업들이 조직적으로 미국 기업들을 무너뜨리는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다루며 경종을 울렸다.
시야를 미일관계로부터 넓혀 미국전체를 들여다봐도 전쟁이후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미국은 퇴보하고 있다는 진단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제2차대전에 참전했던 세대들은 50, 60년대 미국의 번영을 주도했다.
「캔 두 (can do)세대」로 통칭되는 이 세대는 전후 미국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은 고속도로를 만들고, 우주를 정복하고, 대규모 전원주택을 보급하는등 「아메리칸 드림」을 창조해나가는 진취적이고 단합된 세대였다. 그러나 베트남전·인종분규 속에서 성장한 요즘 세대는 이러한 꿈과 기상을 모두 상실했다는 진단이다.
미국이 세계에 자랑하던 튼튼한 중산층은 흔들리고 있으며, 이혼율은 30년동안 3배로 늘고 미혼모가 낳는 사생아가 전체 신생아의 20%나 차지하고 있다.
80년대 들어 가구당 실질소득은 오히려 줄었고 교육의 질은 선진국의 말석을 차지하게됐다.
반면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이제 개인소득에서 미국을 앞질렀으며 이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10년안에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을 앞질러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것으로 예상될 정도니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일본」이라는 자기반성이 나올 수밖에 없게돼 있다.
그러나 일본을 보는 미국의 시각은 이렇게 경쟁과 질투심만은 아니다.
조제프 다이 미하버드대교수는 60년대 미국의 독주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었으며 전쟁 폐허에서 회복된 일본·유럽이 지금 같은 경제력을 갖는 것이 당연한 추세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90년도 미국의 대일본 무역적자가 4백10억달러라고는 하나 이는 미국GNP의 0.75%밖에 되지 않고 일본의 대미투자가 8백40억달러라고는 하나 미국기업자산의 흡1%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낙관론을 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일본이 이룩한 경제력을 국제적 역할 강화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세스 크롬시 미헤리티지재단 아시아연구소장은 일본이 과거한국·중국을 침략하고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이 현재의 정제력을 과연 책임있게 사용할 것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워싱턴=문창극특파원】

<(일본의 시각)겉으론 반성 속으론 "미운미국">
일본의 미 하와이주 진주만공격 50년을 맞아 미일간엔 현재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또 일본이 전후 최초로 일본군대(자위대)를 일본영토밖으로 합법적으로 파병할수 있도록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안을 일본 국회에서 심의하고 있는 시점과 맞물려, 「일본의 장래」에 관한 논의로 일본열도 전체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 논의의 줄거리는 일본이 지금처럼 미국의 시혜와 안보 그늘 아래서 자존심이라곤 없는「반쪽국가」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우호적 경쟁관계」를 새롭게 유지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인들의 심리상태는 태평양전쟁 도발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반성하기보다는 히로시마(광도)·나가사키(장기)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가공할 참상을 더 기억하고 싶은 것 같다. 일본국회는 미국의 반일분위기를 의식, 부전선언을 결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에 대한 반대론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도 혐미·탈미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지난 2일 ABC·TV회견에서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 미국은 일본에 사죄할 생각이 없다』고 밝히자, 가토 고이치(가등통일) 일본관방장관이 즉각 『미국에 사죄를 요구할 뜻이 없다』고 일본정부입장을 밝히고 나선 것은 미국보다 일본국민의 감정악화를 더 의식한 것임이 분명하다.
최근 일본에선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누가 겨야 하는가를 새삼스럽게 따져 묻는 숱한 서적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데, 그 초점은 『루스벨트 당시 미국대통령은 일본의 공격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또 『처칠 당시 영국총리가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일본의 공격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이른바 「연합국 음모론」도 설득력 있게 퍼지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진주만 공격은 그전에 있었던 한일합병·만주사변·중일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미일간에 일어난 「고립된 전쟁」으로만 파악해선 안된다는 시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일본의 태도에 대해 싱가포르 출신의 한 화교 교수는 얼마전 일본 마이니치(매일) 신문에 기고한 「아시아무시의 진주만 논의」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일본이 아시아에 대해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한 이날을 단순히 미일간 「사건」으로 국한시켜 보고자하는 풍조가 있다. 미일 두나라는 아시아국가들의 존재와 그들이 겪은 불행을 잊지 말아야한다. 지금 일본이 위치는 신국제질서와 아시아경제권 주장은 50년전 일본이 외치던 대동아공영권과 귀축미영타도를 연상시키며 이에 아시아인들은 불안을 느끼고있다』【동경=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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