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머뭇거릴 수 없는 국립대 법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국립대 법인화는 정부 조직의 일부, 말하자면 교육인적자원부의 출장소 같던 국립대에 독립된 법인격을 부여하고 권리의무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민 세금으로 지원해온 국립대 경상경비는 학생 수업료와 연동돼 총액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재정 안정성은 보장된다. 대신 국립대는 각각 독립된 경영체로서 중장기 교육목표.계획을 세우고 정부보조금.수업료 등 자기 수입을 재원으로 본연의 교육.연구를 수행해야 한다. 그 결과에 대해선 국민이나 학부모들에게 정보를 공개하는 '사회적 설명 책임'을 다해야 한다.

1980년대 이후 세계 주요 국가들은 대학 개혁을 최우선 정책 과제로 내세워 대학의 관리운영체제(지배구조)와 회계제도 개혁에 나서고 있다. 지식정보의 경제적 가치가 극단적으로 커지면서 대학의 교육연구 능력이 국가발전.경쟁력의 원천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지식 창출과 사회적 전파를 본업으로 하는 대학이 전통적인 학문의 자유와 대학자치 관념에 매몰돼 사회적인 변화와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크게 작용했다. 대중화.정보화.시장화라는 대학교육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변화가 고등교육비를 증가시킨 것도 한몫했다. 제한된 재정지원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선 교육연구 활동 평가 결과에 따라 자원을 경쟁적.차등적으로 배분하고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한 것이다.

그 결과 미국에선 대학 관리조직 중앙집권화와 하위조직 책임운영제가 도입됐다. 영국에선 폴리테크닉 법인화를 통한 대학관리 일원화와 목표관리 운영제가 시작됐다. 전통적으로 대학자치의 보루로 여겨졌던 독일에서조차 포괄예산제도와 재단형 대학이 도입되고, 비국유화가 진행되는 등 대학의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됐다.

이 같은 강력한 행정.정치주도형 대학개혁은 근대 대학의 본고장에 그치지 않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중국.말레이시아.대만.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도 파급됐다. 이들 국가도 국립대 법인화, 관리운영체제 중앙집권화, 목표관리 운영, 경쟁적.차등적 예산배분 도입 등 대학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의 국립대학만이 이런 세계적인 조류에서 비켜나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형국이다. 그 결과는 권위 있는 대학평가기관들이 내린 참담한 성적표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립대 관리운영체제나 회계제도를 개혁하자는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국립대 측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치고 정부부처 간 의견조정이 난항을 겪다가 결국 유야무야돼 왔다.

이런 가운데 한국대학의 모델이 돼야 할 국립대는 설치형태.재정재무관리의 정합성(整合性)이 사라지고, 구조적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띠게 됐다. 다른 정부기구와 함께 일반회계에 편입돼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독자적으로 기성회계.발전기금을 운용하며 고도의 재정자율성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기성회계는 일반회계 지원과 연동되지 않은 제도상의 맹점을 갖고 있다. 자금 용도 역시 당초의 시설 설비비 범주를 벗어나 교직원 급여성 수당.복지후생비로 전용되는 등 재정재무 구조의 난맥상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국립대 법인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은 될 수 없겠지만 최소한 국립대와 국민.사회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대학개혁의 출발점은 될 수 있다. 일본의 국립대 법인화가 교직원에게는 '폭탄'이었을지 몰라도 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국립대를 제자리에 되돌려놓는 축하의 '폭죽'이었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향철 광운대 교수현 교토대 외국인 초청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