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대통령 유신결행|1년반만에 태어난 「서릿발 정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교수대에 매달리기 하루전 80년5월23일. 서대문구치소로 찾아온 동생 항규씨에게 김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79년10월26일 혁명을 결행했지만 내마음은 벌써 3군단장때부터 움직였어. 72년10월 유신헌법이 나왔을때 나는 세번이나 읽었지. 읽는데 분통이 터지더라고.「더러운 놈의 나라, 이게 무슨 헌법이야. 독재하자는거지」라며 고함을 지르고 책을 내던졌더니 자고있던 애엄마가 놀라 깨더군』

<"박씨왕조 세웠다">
『나는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외쳤던 김재규씨의 유신소감이다.
이번에는 김형욱전중앙정보부장의 독설을 들어보자. 김경재씨(전김대중특보·현민주당조직책신청자) 가 대필한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그는 이렇게 유신을 비난했다.
『옛날 왕조시대 임금도 늙은 신하가 호랑이같이 준엄하게 간하면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거칠게 없는 독재자이자 총통으로 군림했다.
국회나 법원은 장식품이고 헌법은 왕이 백성에게 내리는 서릿발같은 칙서에 불과하다. 유신으로 박정희는 사실상 박씨왕조를 세웠다.
인간 박정희에게 잊지못할 배신자가 두사람 있다면 김형욱과 김재규일 것이다. 저승에선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현세로는 그렇다.
그래서 두 김이야기에는 유신에 대한 배신의 살의가 숨어있는 것 같다. 자기변신을 위한 수준낮은 합리화도 있고…. 어쨌든 양인얘기는 유신 매도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 매도론에서 비판론에 이르기까지 유신은 10.26이후 냉혹한 대접을 받아왔다. 고문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은 유신을 나무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긴급조치를 욕하고 김지하를 칭송하며 부마사태를 내세우고…. 인권과 자유를 갈망하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김종비·이후낙·김정렴·신직수·박준규·김치열등 유신담당자군은 5공·6공에 눌려 아무 소리 못했으니 유신 망국론은 말 그대로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신을 그렇게 두들겨 부숴도 뒷맛이 개운치 않은것 같다. 뭔가 해결되지 않은 빚이 있는 느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적지않다. 그 사람들 주장은 『어차피 유신을 씹고 삼켜서 역사의 피와 살로 만들려면 「유신쪽」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박대통령 마음속에 들어가보자. 어록은 심리의 거울이다..
『김실장, 야당은 국민에게 자유와 인권만 주면 공산당한테 이길 수 있다고 떠드는데 다거짓말이에요. 내가 6·25때 육군본부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봤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요.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은 자기 아들을 전부 후방으로 빼돌리거나 외국에 보내고…. 그래서 시골출신 청년은 전방에서 죽을 때 「빽」하고 소리친다는 거잖아요. 북한놈들한테 먹히지 않으려면 다른게 필요해요』

<직선하다간 큰일>
김정렴 전비서실장은 이 말을 전하면서 『유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우리가 이북에 먹혔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6공 고위인사중에도 군대안갔다 온 사람이 많은데 박대통령 시절이었다면 발도 못 붙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71년4월 7대 대선후 청와대에 발탁된 유형인 전정무수석은 박대통령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봐 유비서관, 이런 선거 두번만 하다가는 나라가 결판나겠어. 한번 생각해봐. 군중이 수십만씩 모여있는데 이북 애들이 맘만 먹으면 무슨 짓을 못하겠어. 여당후보가 저격당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반대로 야당후보가 당해봐. 그땐 내란이라도 일어날지 몰라. 어떻게 막겠어. 이북무장공비가 우리나라 경찰복 같은거 하나 입고 수류탄이라도 터뜨리면…. 그런데도 꼭 이런 식으로 대통령을 뽑아야 하나』
이무렵 박대통령은 이후낙부장·김치열차장을 비롯한 정보부 간부단을 청와대로 불러 『수고했다』며 저녁을 낸 일이 있다. 이 자리에 있었던 Z씨는 박대통령 대사 몇마디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봐 자네들 지구상에서 민주주의 하는 나라가 몇개나 되는줄 알아. 16개밖에 없어. 자 한번 봐. 북미에 미국·캐나다가 있지. 아시아쪽은 일본·호주·뉴질랜드뿐이야. 아프리카나 중동엔 눈을 씻고봐도 없고….나머지가 유럽이야. 영국·서독·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덴마크등…. 민주주의라고 말들은 많지만 제대로 한다는 나라는 그저 그쯤인거야.
도대체 유엔회원국이 몇 개야 1백40여개중에서 우리나라가 20위안에 들면 괜찮은거 아냐. 우리나라엔 야당도 있잖아』
박대통령이야기가 끝나자 간부중 몇몇은 「맞장구」를 쳤던 모양이다. 한 사람은 『각하, 태국에 가보니까 한사람이 장관에다, 육군대장에다, 국립은행총재까지 다 하더군요』 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각하, 대만은 지금도 계엄령하에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불도 독재하는데…>
박대통령 「유신어록」이야 많지만 이 세부분은 유신심리학을 요약해주고 있다. 첫째, 안보를 위해선 자유를 양보해야하고 둘째, 경제성장을 위해선「정치과소비」를 줄여야하며 셋째, 프랑스·스페인·대만·멕시코 같은 나라도 불가피하게 독재를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광범위한 개발독재론이다. 물론 하하비비가 분분하지만 어쨌든 박대통령은 그렇게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내가 혁명을 했으니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켜 놓아야 한다』는 독선적 애국심이 추가됐던것 같다.
그리하여 유신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외교관·법률가·학자·국회의원등 많은 이들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잉태된 유신은 HR (이후낙)의 정보부, 김정렴의 청와대비서실, 신직수의 법무부라는 3각 골반지대에서 뼈대를 갖추고 살을 붙여갔다. 대충 71년4월 이후부터 72년10월까지였으니 유신은 1년반짜리 태아였던 셈이다.(26면에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