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부자들은 지금… 마음은 이미 해외로 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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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건만 봄 같지가 않다. 재테크 환경 얘기다. 서해 건너 들려오는 중국의 긴축 우려에 최악의 황사가 따로 없다. 동쪽으로는 일본의 엔-캐리 자금 역류가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먼 미국에선 부동산 대출 부실이 해일을 일으킬 태세다. 안마당도 마찬가지다. 수출과 투자, 부동산시장 등이 점점 움츠러들고 있다. 투자자들의 고민이 쌓여 간다.

그러면 부자들은 어떻게 봄맞이 채비를 하고 있을까.

중앙SUNDAY가 부자 1만900여 명의 투자 보따리를 펼쳐 봤다. 서울 강남ㆍ강북ㆍ강서ㆍ분당ㆍ일산에 있는 국민ㆍ우리ㆍ신한ㆍ하나ㆍ한국씨티은행의 40개 프라이빗뱅킹(PB) 센터를 찾는 부자들의 투자 실태를 살폈다.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부자들의 속성을 감안해 조사는 그들의 자산을 손금 보듯 꿰는 PB팀장들에 대한 설문과 인터뷰를 토대로 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사는 40대 중반 신모 사장은 50억원대 자산가다. 그는 지난해까지 집ㆍ땅ㆍ오피스텔 등으로 30억원, 주식 직접투자로 20억원가량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 사장은 올 들어 포트폴리오를 활발히 교체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가라앉은 데다 국내 증시도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주식 자산을 둘로 쪼개 10억원은 투자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자문형 랩 상품으로, 10억원은 해외펀드로 돌렸다. 부동산도 일부 처분해 해외 부동산펀드로 옮길 계획이다.

■해외펀드가 국내펀드 앞질러
신 사장처럼 부자 5명 중 1명이 ‘투자 보따리’를 바꾼 것으로 파악됐다. 나라 안팎의 투자 환경이 급변하는 데 대해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들은 뜀박질에 지친 중국ㆍ베트남 증시의 바통을 이어 봄기운 가득한 일본ㆍ유럽 증시 등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현재 부자들의 골칫거리 1순위는 부동산이었다. 부자 10명 중 6명은 부동산 자산을 줄일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강남 부자들의 비율(73%)이 높았다.

이유는 뭘까. 신한은행 PB 서울파이낸스센터의 송민우 팀장은 “부동산만 갖고 있으면 무조건 돈이 된다는 믿음이 점차 퇴색하고 있는 것 같다”며 “ 상담 중 부동산 매각 얘기를 꺼내는 부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국민은행 분당 PB센터 천창현 팀장은 “집을 팔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고 실제로도 팔고 있다”며 “연말에 정리한 고객도 꽤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워낙 많이 오른 데다 종합부동산세 같은 보유세 강화와 양도세 중과 등으로 이런 흐름이 일부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은행 대치역점의 정병민 PB팀장은 “투자 수단으로 아파트를 신규 매입하겠다는 고객은 별로 없다”며 “실제로 지난해 5월부터 연말까지 매도 고객이 꾸준히 있었다”고 했다.

다만 세금이 많아도 부자들은 좋은 물건을 내놓지 않으며, 저가 분양으로 차익을 노리는 심리가 여전하다고 말하는 PB도 많았다. 실제로 자산이 30억원을 넘는 부자들의 절반가량은 여전히 금융상품보다 부동산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파트의 대타(代打)로 부상한 건 상가와 땅이었다. 관심 있는 부동산을 묻자 ‘상가’가 1위(43%)에 올랐다. 특히 강북ㆍ강서 부자들이 상가를 많이 주목하고 있었다. 상가는 임대료를 통해 대출이자를 해결할 수 있는 데다 증여할 때 재산가액 자체가 적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아 ‘수익성+세(稅)테크’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부자들이 선호한다고 PB들은 밝혔다. 신도시나 개발지역 상가 등에서 시세차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자도 여전히 많았다.
상가에 이어 신도시 예정지 같은 개발지역 땅이 2위(30%)를 차지했다. 분당ㆍ일산 쪽 부자들이 유망한 토지에 관심이 많았다. 반면 부촌 1번지인 강남의 부자들은 해외 부동산(46%)에 가장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정부의 해외 부동산 투자 완화 대책 등과 맞물려 그만큼 재빠르게 보폭을 넓혀 가고 있다는 얘기다.

■지구본 껴안고 24시간 고민

부자들은 해외 경제 동향에 아주 민감했다. 가장 불안한 재테크 변수로 ‘국내경기 침체’(28%)에 이어 ‘해외경제 하강’(25%)을 꼽았다. 특히 강북보다 강남 부자들이 해외 쪽 뉴스에 더 민감했다. 신한은행 박기섭 팀장은 “펀드ㆍ부동산 등으로 나라 밖에 돈을 묻어둔 부자가 부쩍 늘었다”며 “요즘처럼 국제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상황에선 밤잠을 설치기 일쑤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실은 조사 대상 부자들의 투자 보따리에서 해외펀드 비중(13%)이 국내펀드(10%)를 눌렀다는 점에서도 확인됐다. 국내 주식 수익률은 시원치 않았지만 중국ㆍ베트남 같은 해외증시가 돋보였던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런 흐름이 두드러졌다. 국민은행 천창현 팀장은 “다양한 해외펀드가 등장한 게 1년 전부터”라며 “발 빠르게 해외펀드로 옮겨 탄 투자자들이 큰 수익을 올리자 뒤따르는 이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조사 결과 현재 부자들이 가장 관심을 두는 투자처 역시 해외펀드(75%)로 나타났다. 강남북을 가리지 않고 톱에 올랐다. 요즘 해외펀드 투자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한편 강남의 거부들을 중심으로 미술품이나 골동품 등의 투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PB 팀장들은 전했다. 재테크의 역사를 보면 투자 게임이 막바지에 이를 때 고수들은 희귀성이 강한 미술품 등을 놓고 한판 승부를 겨루곤 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김준술 기자
김희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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