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야화(1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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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해방 후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라고 떠들어댔지만 춘원과 육당은 그렇지 못했다. 친일행동을 했다고 죽일 놈 살릴 놈하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조용히 숨어있었다. 육당은 우이동에서, 춘원은 효자동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육당은 거기서 『조선독립운동사』『국민조선력사』『쉽고 빠른 조선역사』『천만인의 상식』같은 새 나라 국민들의 계몽을 위한 책을 열심히 쓰고 있었다.
중국에서 환국한 생재 이시영이 우이동으로 육당을 찾아왔고, 유동세도 자주 우이동에 나와 오랫동안 담소하다 갔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우이동 봉황각에서 열린 흥사단의 연차대회에서는 육당이 초빙되어서 일장 강연을 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 2월에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입감되었고 3월에 「자열서」라는 자기비판의 글을 발표하였다.
춘원은 해방 후에 효자동에서 다시 사릉으로 주소를 옮겨 농사를 지으면서 집필에 몰두하였다. 수필집 『돌 베개』를 쓰기 시작하였고 『나』『스무살 고개』『도산 안창호』등을 써냈다.
내가 춘원을 최후로 만난 것은 효자동 집과 사릉농장을 왕래할 때인데 그때 하몽 이상협의 권유로 소설 『사랑의 동명왕』을 쓰고있었다.
그때가 봄이었는데 춘원은 후줄근한 검은 동복을 입고 있었고, 옆에 놓인 회색 중절모는 찌그러져 있었다.
장소는 제동 네거리. 지금의 일본대사관 도서실이 있는 곳이다.
그때 그 집은 정갈스런 2층집으로 위층에서 설렁탕을 팔고 있었다.
이상협이 춘원을 불러 소실 원고 독촉을 하는 판이었다.
당시 점심은 설렁탕이 최고 식사이었다.
춘원은 기분이 매우 좋아 설렁탕 한 그릇을 거뜬히 비웠다.
『요새 좌우익 싸움이 대단한 모양인데 조군은 어느 쪽이야.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춘원은 내게 이런 소리도 하였다.
『월탄 박종화가 대단한 인기라지. 그 사람 집에 조지훈·김동리 같은 젊은 패들이 드나들면서 이태준·임화의 좌파들에 대항하는 우익 문학단체를 만들 계획이라면서. 월탄이 보스가 되어 가지고-.』 이런 소리를 하면서 춘원은 아직도 문학에 대한 정열이 식지 않은 것을 보여주었다.
춘원과 이상협은 어떻게 잘 아는 사이인고 하니 젊을 때 육당이 경영하는 출판사 신문관에 두 분이다 자주 출입하였기 때문이었다.
춘원은 아주 붙박이로 신문관 사무실에서 자고 먹고 하였고 여름이면 육당 마나님이 춘원의 모시두루마기를 빨아 다려서 내보낼 지경이었다.
그 뒤에 춘원이 와세다대학에 다니면서 그 당시의 매일신보에 소설 『무정』을 연재하였는데 그때 매일신보의 편집국장이 이상협이었다.
원고료는 한 달에 2십 원이었는데 이상협이 꼭꼭 동경으로 부쳐주어 그것으로 춘원은 학비를 썼다고 한다.
시대는 바뀌어서 춘원이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이상협은 매일신보 부사장으로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반대 성향의 신문사에 있었으므로 만나서 어떻게 수작을 하나 하고 나는 흥미 있게 지켜보았다.
이상협이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하고, 춘원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요새 몸이 퍽 좋아졌군』하니까 춘원은 웃으면서 『응, 괜찮아』라고 옛날 그대로의 친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너는 총독부기관지의 부사장이 되었으니 좋지 않다 하고 서먹서먹하게 대하지나 않나 생각하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역시 그대로였다.
이것은 나중에 설렁탕 집에서 헤어질 때 두 사람의 행동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설렁탕집에서 작별할 때에 이상협이 『서울에 이제 그만 있고 어서 시골 내려가서 원고나 빨리 써요』하니까 춘원은 입을 삐죽대고 『하몽, 괜히 팔리지도 않을 책을 어서 쓰라고 독촉하지 말아요. 며칠 안 가서 단두대에 올라갈 놈의 소설을 누가 사보기나 한답디까』하고 별안간 쓸쓸한 얼굴이 되었다.
이상협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여 가지고 꾸짓 듯 소리쳤다.
『그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해요. 단두대가 무슨 빌어먹을 단두대란 말이오.』 춘원은 그냥 쓸쓸한 얼굴로 설렁탕집을 나섰다. 나는 이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것이 내가 춘원을 만난 최후가 되었는데 그는 그 뒤에 반민법에 걸려 1949년 2월에 육당과 같은 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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