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경색 딛고 … 전갈처럼 독한 인생들 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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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원일(65.사진)씨가 갑자기 입원했던 건 지난해 가을의 일이다. 글 쓰던 손이 저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마비 증세가 왔고, 온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까지 악화됐다. 병명은 뇌경색. 흔히 말하는 풍의 초기 단계였다. 평소에 워낙 술.담배를 즐기던 작가였기에, 문단은 하나같이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소설가 공선옥(43)은 강원도의 용하다는 한의사를 소개했고, 비방을 전해준 문단 후배도 여럿이었다.

작가는 1주일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서 요양을 했다. 하루 세 갑씩 태우던 담배를 끊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술도 최대한 삼갔다. 마비 증세는 덜해졌지만, 하여 말하는 것도 훨씬 자유로워졌지만, 겨울을 보내면서 그는 5㎏이나 살이 빠졌다.

그래도 그는 소설을 내려놓지 않았다. 13번째 장편소설 '전갈'(실천문학)을 발표한 것이다. 봄볕 따사로운 16일 정오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 그가 모습을 나타냈다. 핼쓱한 얼굴에서 오래 앓은 흔적이 배어났다.

"처음 아플 때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이런 생각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어. 잠도 오지 않아 억지로 수면제를 먹을 때도 있었고. 우울증이 심해졌지. 통풍이 와서 잘 걷지도 못했고. 지금은 많이 나았어요. 오늘 한 달 만에 술을 입에 대보네."

소설은, 소위 '김원일 표'라 할 만하다.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해 역사와 사회, 그리고 인간의 문제를 묵직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일제 강점기부터 산업화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 100년을 새로이 풀어낸다.

소설은 세 남자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때 만주에서 독립군이었다가 일본 관동군 사령부에서 일하고 광복 이후엔 좌파로 살다 간 할아버지 강치무, 프레스 공장에서 오른손을 잃고 폭력과 갈취로 인생을 탕진한 아버지 강천동, 그리고 30대 중반의 조직폭력배 아들 강재필. 소설은 이들 3부자의 "구정물 속과 같은" 삶을 그린다.

"한국 현대사에서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가령 일제 때 친일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반일과 친일은 이분법으로 나뉘는 게 아니었다. 일제라는 그늘에서 살았다는 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그 체제를 위해 존재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게 살다간 사람들, 그 고단한 생애를 말하고자 했다."

작가는 3부자 가운데 아버지 강천동을 가장 아끼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산업화 시대 지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란다. 그 독한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독을 품고 사는 전갈을 소설 제목으로 정했던 것이고.

"내가 쓸 수 있을 때, 내 시대에 맞는 얘기를 쓰고 싶어요. 앞으로 언제까지 더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잘해야 장편 한두 편 더 쓸 수 있으려나. 그러나 소설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안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에요. 그러고 보니 벌써 40년 넘게 소설을 쓰고 있네."

무심코 뱉은 말이겠지만, 무언가 자꾸 걸리는 듯했다. 김원일 특유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이제는 거두려는 뜻인가 싶어 안타까움마저 일었다. 하나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선 불안한 마음 이내 떨쳐냈다. 6월께 산문집을 출간할 예정이고, 가을엔 소설집을 발표할 계획이란다. 원고는 진작 마감했단다.

글=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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