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골프장 팔아 나누려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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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골프장 사장 납치 사건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전직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가 납치 사건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 최대 스캔들의 주인공인 J씨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도 가담했다. 돈을 둘러싼 가족 간의 분란은 사건의 긴장감을 더한다.

◆ '007'영화 같은 납치 과정=경찰에 따르면 H골프장 강모(59) 사장 일행 납치 사건은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됐다.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 김모(41.구속)씨와 강 사장의 외삼촌인 윤모(66.구속)씨, 모 M&A사 정모(38.수배 중) 대표가 납치를 모의한 것은 지난달 20일.

김씨는 경기도 한 지청에 근무하던 2001년 소송 관계로 윤씨를 처음 만났다. 김씨와 정씨는 2006년 김씨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됐다. 정씨는 J씨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들은 강 사장을 납치한 뒤 골프장 사장을 윤씨로 바꾸고, 곧장 골프장을 팔아 돈을 나누기로 했다. 예상 매각가격은 3500억원.

정씨는 윤씨에게 "끝난 뒤 1500억원을 달라"고 요구했고 즉석에서 계약(◆ )이 이뤄졌다. 김씨는 300억원을 챙기기로 했다.

이들은 골프장을 판 뒤의 계획까지 세웠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은 '완전범죄를 위해 강씨를 일본에서 수장시키자'고 모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변호사 김씨와 M&A사 사장 정씨는 강 사장 일행의 납치를 진두지휘했다. 2003년부터 2년간 국정원에 파견돼 일했던 경험이 있던 김씨는 '국정원 직원을 사칭, 강씨를 간첩 혐의로 체포한다'는 작전을 짰다. 이들은 사설 경호업체 팀장 김모(32.수배 중)씨를 "성공하면 100억원을 주겠다"며 끌어들여 납치 현장에 투입했다.

렌터카 업체에서 승합차를 빌린 이들은 D-데이를 강 사장 일행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2월 26일로 잡았다. 그날 저녁 7시40분. 강씨 일행은 인천공항 여객터미널 앞 횡단보도에 서 있다 흰색 승합차가 지나간 뒤 감쪽같이 사라졌다.

◆ 경찰 추적과 탈출 과정=공항에 강 사장 일행을 마중나왔던 골프장 관계자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공항 CCTV를 분석, 범행에 이용된 승합차를 찾았다.

하지만 승합차는 대전 지역 폭력배인 한모(50)씨가 대여한 것으로 돼 있었다. 한씨는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던 터라 수사는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28일 오후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수사가 급진전됐다.

강원도 평창의 펜션에 감금돼 있던 강 사장 일행이 탈출한 것이다. 강 사장은 자신을 감시하던 경호업체 관계자들에게 "손목이 아프니 수갑을 좀 풀어달라"고 한 뒤 이들의 얘기를 고분고분 들어주며 안심시켰다. 그러다 감시가 느슨해지자 탈출했다. 강 사장은 "친척의 사주로 폭력배들이 나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강씨가 지목한 윤씨 등 친척 2명을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김 변호사와 정씨의 개입 사실을 확인했다.

◆ 부장검사 출신이 왜◆ =김 변호사는 검사 시절이던 2004년 '검사님 법이 뭐예요'라는 어린이용 법률 입문서를 펴냈다. 그는 책에 "법은 나라에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어기면 경찰서에 잡혀가거나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고 적었다. 이 책은 서울 강남의 일부 학원에서 논술 교재로 쓰이고 있다. 그런 김 변호사의 사건 행적은 충격적이다.

강 사장을 감금한 다음 날 가짜 주총 서류를 들고 수원등기소를 찾아 골프장 대표를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서류 미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변호사는 렌터카 대여자를 자신들과 관계가 없는 한모씨로 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강씨 일행이 탈출한 뒤에는 납치 가담자를 모아 '48시간 동안 묵비권을 행사하라''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하라' 등 행동 지침까지 전달했다. 2000만원의 도피자금도 줬다.

김씨는 경찰에서 "소유권 이전 등과 관련한 수임료로 20억~30억원 정도를 받으려 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3일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서는 "정씨의 협박에 못 이겨 가짜 체포영장을 만들었다"며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김씨는 92년 검사 생활을 시작, 지난해 초 모 지방검찰청 지청 부장검사를 끝으로 충청도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김씨 가족들은 "경찰의 강압 수사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강갑생.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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