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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541)-서울야화(8)-좌우대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세력이 남북한에 따로 세워지는 반쪽 정부는 인정할 수 없다며 활발한 대유엔 활동을 벌이자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 정부만이 유엔을 상대할 수 있다며 강력한 반발을 표시했다.
그러나 협상세력의 통일독립국가 수립운동은 남북한에 각각 분단 국가가 성립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고 추진세력은 분단체제의 고착화와 동시에 탄압, 제거되었다.
이들은 탄압속에서 혁신정당 운동으로 그 맥이 이어져갔고 4·19후에 한때 표면화되었다가 5·16으로 다시 탄압을 받아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동안 서울에서는 1948년 4월16일 남한 총선거 입후보를 마감하여 9백여명이 등록하고,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하에 국회의원선거를 별 사고없이 끝냈다.
남한에서 총선거가 끝난지 나흘만인 5월l4일에 북한은 김구·김규식과의 약속을 뒤집고 남쪽으로 보내는 전기를 끊어버렸다.
여기서부터 북한은 남한을 속이고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본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동안에 북한 공산당의 속셈도 모르고 그들을 따라갔던 남쪽의 순진한 사람들의 낭패는 보기 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보다 더 큰 야욕을 품고 있었던 것을 남한의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일반국민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5월31일에 처음으로 국회를 개원해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원을 뽑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7월12일에 대한민국 헌법을 통과시킨 다음 7월12일에 공포하였다. 20일에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 20일에 이들이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8월1일 국무총리로 이범석이 국회 인준을 받았고, 8월15일에 하지중장이 미군정 폐지를 선언하고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동시에 북쪽에서는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 나라가 완전히 두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해방직전의 일들을 회고해보면 일본사람들은 해방만 되면 조선사람이 그동안 압박당해온 것에 분통이 터져 폭동을 일으켜 자기들을 모조리 죽일줄 알았었다. 이 때문에 미리 송진우 같은 민족진영의 거두에게 양해를 구한 것이고 송진우가 거부하자 여운형에게 달라붙은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측의 예상과는 달리 조선사람들은 당연히 처단하여야할 악질적인 일본인들까지도 손하나 못대고 고스란히 제 나라로 보내버렸다.
일본 경찰에, 관리에게 말할수 없는 악독하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아왔으므로 이쪽에서도 당연한 보복이 있어야 했다.
가해자이니 일본인들도 그것을 각오하였었는데, 그까짓 세간 나부랑이나 옷가지를 얻어 가진 것만 감지덕지해 일본인들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렇게 온순하고 선량하던 백성들이 어느틈에 사나워졌는지 좌우익 싸움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갖 악독한 짓을 다하게 되었다.
마텔이라고 하는 프랑스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1900년초 러일전쟁전에 조선에 와서 40년동안 살다가 태평양전쟁때 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비난하다가 프랑스로 쫓겨갔다.
이 사람이 해방후 1947년 서울에 다시 왔었는데, 그때 나를 보고 조선사람이 그전에는 몹시 양순했었는데 다시 와보니 아주 거칠어지고 사나워졌으니 이게 웬일이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해방후 얼마 안가서부터 민심이 거칠어져간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속칭 빨갱이라는 좌익이 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해방된지 2, 3일뒤에 길거리에 「박헌영 나오라」는 벽보가 나붙어 있었는데 박헌영은 시골에서 벽돌공장 직공으로 있다가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벽보는 좌익패들이 은신해 있던 그를 빨리 나타나라고 재촉하기 위해 붙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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