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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안팎의 시련 이겨낼 수 있을까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美선 가격 올리자 소비자 저항 #국내 점유율 줄고 신흥시장은 日 약진으로 고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요즘 경기도 광주에 있는 별장을 자주 찾는다(별장이라곤 하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깨끗한 농가 수준이다). 지난해 초만 해도 뜸했던 별장행은 비자금 사건 직후부터 잦아졌다. 구속 직전에도 별장에 들러 정 회장은 혼잣말로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시작된 별장행이 요즘도 이어지고 있다. 혼자 올 때도 있고, 가끔은 계열사의 C사장과 함께 온다.

그의 발길을 별장으로 이끈 것은 외로움도 있지만, 최근 들어 이상 조짐이 있는 현대차그룹의 경영과도 관련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말부터 급속도로 미국 시장에서 재고가 늘어나고 있다. 아침 6시30분이면 의욕적으로 출근하던 정 회장이 부쩍 별장을 자주 찾는것은 의외의 풍경이다. 주변에서는 “회장님이 예전보다 기가 많이 꺾이신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의외의 풍경은 정 회장에게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현대차는 지난 2월 15일 정기 임원인사를 했다. 250명의 임원이 승진했고, 특별한 문책인사는 없었다. 승진 폭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인사가 있기 9일 전인 2월 6일, 법원은 정몽구 회장의 비자금 조성 및 배임 혐의에 대해 징역 3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법정구속은 면했지만 정 회장은 앞으로 지루한 법정 투쟁을 해야 한다.

여기에 현대차의 미국 시장 재고는 지난 1월까지 계속 증가하는 상황이었다. 국내 판매 역시 다른 회사들은 성장하는 데 비해 현대차는 떨어졌다. 1월에는 노조의 성과급 요구 파업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상용차는 2교대 근무에 합의했다가 무효화했다. 2월 15일 전 상황을 보면 대대적인 물갈이나 문책인사가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현대차 핵심 임원에 따르면 이번 인사는 일종의 ‘달래기 인사’ 라는 분석이다.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내부에서 반발이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자는 것이다. 이미 내부자 고발로 큰 홍역을 치른 마당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이해되는 부분이다. 익명을 요구한 현대차 관계자는 “이런 저런 상황이 정리되면 제대로 된 인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내부에서도 지금 상황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차 해외시장 딜러들도 최근 현대차 문제를 ‘위기’로 진단하고 있다. 가장 큰 위기는 미국 시장에서 찾아오고 있다. 2000년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그룹을 맡으면서 시작된 미국 시장 공략은 현지 공장의 준공과 함께 순조롭게 출발하는 듯 했다. 확연히 달라진 품질과 해외 평가기관의 호의적인 평가에다 현지 공장을 통한 현지 생산체계를 구축하며 머지않아 미국 시장에서 제2의 일본 차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적정 재고량보다 2만 대 많아

문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우선 환율하락으로 수익성이 급속히 악화됐다. 또 렌터카 업체에 대량으로 판매하는 플리트 세일(Fleet Sale·렌터카 업체에 대량으로 일괄 판매하는 것)을 지난해 9월부터 중단하면서 재고량이 급증했다. 2월 판매량에서는 다소 나아진 점이 있지만 앨라배마 공장 생산 차의 누적 재고량은 지난달 말 현재 9만8000대에 이른다. 이는 적정 재고량(3개월치 판매예상분)인 7만5000대보다 2만 대 이상 많은 규모다.

재고가 급증하면서 이번에는 딜러들이 과도한 인센티브를 줘가며 판매에 나섰다. 수요 공급의 원리상 수요보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고 구매자의 시장(buyer’s market)이 된다. 현재 미국에서 현대차 쏘나타(2.4모델)의 공식 판매가격은 2만900달러다. 여기에 딜러에게 1000달러라는 공식 리베이트가 있다. 한 대 팔면 딜러에게 1000달러가 생긴다는 얘기다. 사실상 가격이 1000달러 할인되는 효과를 갖는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더해 비공식적으로 1000달러의 리베이트가 더 있고, 최근에는 모터쇼가 열리는 동부지역, 예를 들어 오하이오·뉴욕·미시간 주 등에서는 오토쇼 캐시라는 명목으로 500달러의 리베이트가 더해진다. 또 생산한 지 120일 이내에 팔리지 않는 차는 1000달러의 리베이트가 더 붙는다. 이렇게 해서 총 3500달러의 할인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상 1만7000달러 대에 쏘나타를 파는 셈이다.

이에 비해 쏘나타가 경쟁 차종으로 볼 수 있는 도요타의 캠리나 혼다의 어코드는 미국 시장에서 2만3000~2만4000달러대에 정가로 팔린다. 전반적으로 이런 가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도요타와 현대차의 지난해 말 미국 시장 점유율은 15.4%와 2.6%로 큰 격차가 난다(물론 미국 시장에서 도요타가 파는 모델 수가 더 많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 시장에서 잘 나간다던 쏘나타가 왜 이렇게 됐을까? 우선은 현대차의 고급화 전략과 이에 따른 가격 인상 전략이 판매 감소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2005년 NF쏘나타를 미국에 내놓으면서 기존의 EF쏘나타에 비해 가격을 8.5~15.6% 인상했다. 또 2006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쏘나타는 물론 그랜저·산타페·아반떼 등의 가격을 줄줄이 인상했다.

특히 아반떼는 지난해 8월 1313달러를 올려 경쟁 차종인 도요타의 야리스보다 비싸졌다. 환율 하락에 따른 영향이겠지만 이런 가격 인상이 ‘값싸고 좋은 차’라는 현대차의 기존 강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단기간에 많이 오른 가격 때문에 소비자들이 구매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승민 재미 자동차 칼럼니스트는 “현대차의 품질이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경쟁 차종인 일본 차의 명성이나 브랜드 파워를 한번에 극복할 수준은 아니다. 아직도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값싸고 좋은 차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데 의외로 가격이 높아지면서 소비자들의 선택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가 품질 개선과 함께 가격을 서서히 높여 가면서 고급화로 승부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북미 지역의 판매 정체도 이런 과정에서 오는 진통으로 볼 수 있다. 다시 가격을 내리는 것보다는 품질을 더욱 높이고, 브랜드를 고급화하는 것이 방법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현대차가 과연 이 기간을 버티면서 연착륙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고급화 전략 연착륙할지 관심

결과적으로 플리트 세일을 중단시키면서 쏘나타의 가격은 과거 EF쏘나타 급으로 다시 돌아갔다. 명목상의 가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팔리는 가격이 시장가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2005년 NF쏘나타 출시 이후 현대차가 꾸준히 추진했던 가격 인상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시장에서 현대차가 원하는 가격, 즉 일본 차와 비슷한 가격을 받을 수 있기까지 상당한 시간이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재고 누적에 대해 전직 현대차 고위 임원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자동차업을 하다 보면 물량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제조업의 특성이 다 그런데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예상했던 규모보다 시장에서 덜 팔려도 그 규모를 줄이기 힘들다. 인원 및 장비 구조조정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부품업체와의 재협상도 필요하다. 때문에 ‘시장의 요구’보다 ‘공장의 요구’에 따라 생산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공장에서 재고가 누적되는 건 그 때문이다. 생산은 시장의 요구에 따라야 가격도 유지하고, 브랜드 파워도 유지할 수 있다. 공급 초과 상태에서는 가격 정책이나 브랜드 정책을 쓸 수 없다. 딜러들이 훤히 다 알고 있는데 더 많은 인센티브를 요구하지 않겠는가? 지금 현대차의 재고 누적과 북미 시장의 판매 부진은 과도한 공장 투자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현재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의 재고 누적이 앨라배마 공장의 조기 정상화와 이에 따른 과도한 생산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자동차 업계 한 관계자의 얘기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현대차가 미국 공장을 건설하면서 노조가 상대적으로 약한 앨라배마를 선택했지만 그곳에는 주요 부품업체가 없다. 주요 부품업체는 동부 지역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부품 조달을 위해 한국 등에서 부품업체와 동반 진출했는데 부품업체들의 수익성을 맞추기 위해서는 연간 일정 물량을 소화해 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앨라배마 공장의 생산량이 어느 정도 돼야 하고, 이를 진출의 전제조건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품업체에 보장한 물량 소화를 위해서라도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은 생산량을 줄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아차가 앨라배마와 비교적 가까운 조지아에 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앨라배마나 중국 등 최근에 세운 현지 공장들도 아직까지는 수익이 난다고 말할 수 없다. 앨라배마의 경우 공장 투자와 관련된 일체의 금융비용을 본사에서 부담하기 때문에 인건비와 세금 등 지출항목이 적다. 현대차의 내부 분석에 따르면 투자 원금까지 고려하면 앨라배마 공장의 손익분기 시점은 2세대 쏘나타가 생산되는 2011년 정도로 보고 있다. 이렇게 투자비용을 고려한 원가를 보면 현대 아산공장을 100으로 했을 때 베이징 현대차 공장은 120, 앨라배마 공장은 132로 아직 원가가 높다.

러시아에선 포드에 1위 뺏겨

이처럼 현대차가 추진한 글로벌화와 고급화가 아직까지는 현대차 경영에 재무적으로 부담이 되고 있다. 물론 현대차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고급 시장 진출과 글로벌화는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이다. 하지만 현대차가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감당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전직 현대차 사장을 지낸 한 인사는 “현대차는 이것보다 더한 악조건에서도 이겨 나왔다”면서 “사업을 하다 보면 호황도 있고 불황도 있게 마련이다. 위기론으로 단정할 필요 없다. 충분히 극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장이란 한꺼번에 크게 만들어서 확 밀고 나가는 것보다 조금씩 조금씩 다져가며 가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 일류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닌데 고지가 눈앞에 보인다고 무리해서 한꺼번에 하려고 하면 위험해 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자동차의 본고장 북미 시장에서의 고전과 더불어 최근 현대차를 더욱 긴장시키는 것은 러시아·인도·중국 등 이른바 신흥시장에서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현상이다. 현대차는 러시아 수입차 시장에서 3년 만에 1위 자리를 포드에 내줬다. 현대차는 지난해 러시아에서 10만685대를 팔아 포드(11만5985대)에 선두자리를 양보했다. 도요타(2위)에도 추월당했다.

인도와 중국에서도 안심할 수 없다. 인도에서 현대차는 인도 현지 자동차에 이어 줄곧 2위를 지키고 있지만 혼다(4위)와 도요타(8위)가 맹렬한 속도로 추격해오고 있어 수성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 상황도 예사롭지 않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올해 안에 도요타에 덜미를 잡힐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다.

중국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차는 지난해 4위(시장점유율 7%)로 제자리걸음을 했지만 10위권 밖에서 맴돌던 이치도요타가 7위(5.5%)로 따라붙었다.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현대차가 약세인 동남아와 유럽 시장에서는 아직까지 이렇다할 실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외환(外患)을 겪는 동안 내우(內憂)도 일어났다. 연초부터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노조 파업은 이미 알려진 바다. 신흥국가의 경제개발과 함께 세계적으로 공급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상용차 부분은 노조의 2교대 근무 거부로 수출물량이 수개월 치 밀려 있다.

GM대우나 르노삼성, 쌍용차 등 외국업체에 인수된 한국 자동차 회사들은 국내시장 점유율을 차근차근 늘려가고 있는데 현대차는 지난해 12월 이후 3개월 연속 내수시장 점유율 50%를 밑돌았다. 문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가 체결되거나 한·일 FTA가 성사된다면 현대차의 내수시장 수성이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수출 차와 국내 차 가격 차이가 30% 이상 나는 상황에서 미국, 일본 차들이 자국 가격으로 한국에 수출할 경우 현대차는 품질과 가격 경쟁을 해야 한다.

더욱이 중국도 2010년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중국 차가 ‘값싸고 괜찮은 차’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 현대는 아래위로 공격을 받고 있다.

이석호 기자 luk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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