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칼럼

데마고그이기엔 너무 온화한 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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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운찬 전 총장이 속된 말로 '포스'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뭔가 갈등을 수습할 것 같은 막연한 호감, 성난 사람들과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것 같은 설득력과 온화한 이미지가 그렇고, 정부 정책에 일침을 가하는 지혜와 강단이 그러하다. 여기에 서울대학교 총장이라는 아우라를 갖췄으니 대박에의 예감이 들기도 한다. 대중적 인기가 필수적 요건이라는 점에서 정치가는 영화배우나 가수와 다를 바 없지만,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별난 자질을 요한다. 웬만큼 데마고그(선동가)여야 하고, 나아가 책임윤리에 투철한 데마고그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의 역사사회학자 베버의 제언이다. 정치가는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유일한 인간공동체, 즉 국가를 운영하는 자로서 이 강제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정치가는 국가의 정당한 폭력을 수단으로 뭔가 대중에게 바람직한 '천사적 대의'를 성취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탈자(정적)를 끌어안고, 중립지대로 끊임없이 피신하는 관료집단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선동가적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대규모 이탈을 조장한 이 정권 사람들은, 베버의 표현대로, '형편없는 데마고그'였다. 그러면 정운찬 전 총장은 '선의'의 학교정치(school politics)에서 '악마적' 현실정치(real politics)로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그는 데마고그가 아니기에 대학정치에 성공했다. 대학에도 갈등이 존재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어딘가 모가 난 학식 높은 교수집단에는 '건드리지 않고 도발하지 않는 것'이 성공의 제일 원칙이다. 중뿔나게 나대 봐야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항명뿐인 작은 영주들의 집합체, 대학에서 데마고그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판에서는 '뜨거운 확신'을 실천하기 위해 뻔뻔함과 집요함을 고의적으로 행사하는 남다른 열정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 그는 본질적으로 케인스주의자다. 그가 펼칠 개입주의정책은 자유주의 시장경제론자들과 부딪힐 것이다. 그는 복지중심적 '큰 정부'를 지향한다. 그래서 대책 없이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지배 언론 및 일부 지도층과 일대 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는 화합형 인물이다. 그래서 사소한 쟁점들을 침소봉대해 정치 대결을 일삼는 정당들에 환멸을 느낄 것이다. 그가 배양한 선의의 열정을 '비창조적 흥분'으로 몰아갈 현 정치 풍토에서 받을 상처와 환멸이 그의 지혜와 소신을 접게 만든다면 베버가 둘째 요건으로 든 책임윤리에 투철할 기회도 사라진다.

'결과에 대한 책임'이라는 상식적인 말로 표현되는, 그러나 역사적 균형감각이라는 시대적 덕목과 연관된 책임윤리의 실행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정당구조다. 왜냐하면 급조된 어떤 정당이 그를 추대했을 때, 악마적 현실정치와 타협하지 못한다면, 또는 불리한 입장을 역전시키려는 그의 고객들에게 작은 성공이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는 언제든지 버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책임을 다했다고 '개인적으로' 누추하게 회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마고그이기엔 너무나 온화한 그대'를 부르는 유혹의 손짓에 화답하려거든, 무엇보다 그를 추대한 정당이 책임윤리에 투철할 기회를 줄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다급해진 정당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열린우리당에서 목격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