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76. 이북 친구 여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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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어린 시절 친구였던 여연구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1991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여성대회에 북한 대표로 여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왔다. 그녀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인 여운형 선생의 둘째 딸이다. 그녀가 북한으로 떠날 때까지 우리는 앞뒷집에 살며 거의 매일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뉴스를 통해 연구가 서울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은 설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얼마 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 만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북한에서 온 사람을 만나려면 수속이 너무 복잡했고, 정치적 만남으로 보일까봐 망설였던 것이다. 대신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중국에서 만날 계획이었다.

한국일보 사장을 지낸 장명수씨가 그뒤 북한을 방문했을 때 여연구를 만나 내 얘기를 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명자(노라 노의 본명)가 만들었다고 얘기한 것이 지금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장씨의 말에 연구는 반색하며 "나도 명자가 만든 옷을 입어봐야 하는 건데"라며 자신이 서울에 갔을 때 내가 찾아오지 않은 걸 퍽 아쉬워했단다. 장씨 말로는 꽤나 고생한 듯한 인상의 연구는 서울에 왔을 때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 손으로 연구에게 옷 한 벌 못해 입힌 게 무척 안타깝다.

연구의 언니는 난구씨였다. 일본에서 의상학교를 다녔으며 미인이었다. 연구의 바로 밑 동생인 원구가 세 자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다. 사회당 당수였던 고정훈씨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갔을 때 원구를 만났다고 한다. 원구는 자매 중 미모가 가장 뛰어났다.

고 선생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여전히 인상적이라고 전해줬다. 어릴 때 기억 뿐인 연구의 남동생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연구는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며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다. 연구가 쓴 책 '나의 아버지 여운형'을 읽으며 멀리 가버린 어린 시절이 되살아났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이웃집 아저씨'이자 친구의 아버지, 여운형씨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번 더듬어본다.

어릴 적 친구를 눈앞에 두고도 만날 수 없는, 역사가 만들어 낸 우리의 처지가 참으로 안타깝다. 여름방학 어느 날 새벽, 집 앞 중학교에 담을 넘어 들어가 철봉 위를 걷다가 떨어진 일, 학교 모래사장 위에서 방학숙제를 같이 하던 일…. 연구와 함께 그 많은 추억들을 밤새도록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나 싶어 너무나 아쉽다.

남과 북으로 갈려 전혀 딴 세상에서 살아온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반세기를 지내며 연구는 북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나는 남쪽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 왔다. 인생은 어느 한 순간 갈림길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남쪽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늘 하나님께 감사한다.

노라 노·(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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