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비서실장은 그림자 되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비서실장에 관한 특별한 법은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정립된 정도(正道)는 '그림자론'이다. 비서실장이든 비서든 윗사람의 그림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秘)란 비밀 아닌가. 미국정치를 전공한 김민전 경희대 교수는 "미국인 대부분은 백악관 비서실장 이름을 모른다. 대통령의 입은 대변인이 담당하고 비서실장은 커튼 뒤에 숨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림자론에 가장 충실했던 이는 9년2개월간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다. 9년2개월이란 기록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는 회식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래를 시켜도 '산토끼'나 '자전거' 같은 동요만 불렀다. 사진에 찍히지 않으려 몇 발짝 뒤에 걸었다. 그림자의 분수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2004년 12월 노 대통령의 김우식 비서실장이 그의 집을 찾았다. 김 실장은 김씨의 강경상고 17년 후배다. 김 실장은 조언을 구했고 김씨는 비서실장의 3대 수칙을 얘기했다. 나서지 말고, 국정 전반을 잘 파악하고, 대통령과 내각의 가교가 돼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자론은 모든 정권에 해당된다. 김영삼(YS)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비서실장이 입을 열면 대통령의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부처가 다른 의견이 있어도 말을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의 비서실장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노 대통령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며 "시스템이 뒤틀린 데는 대통령의 책임도 크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희망이었든 자신의 욕망이었든 이병완 실장은 그림자에서 뛰쳐나와 전선(戰線)에 섰다. 강연.기자회견.e-메일 통신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정권 비판 그룹을 공격했다. 나중엔 같은 여당에도 활을 쏘았다. 지난달 7일 그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의원들을 "한나라당 2중대"라 했다. 지난해 12월엔 비서실 직원들에게 송년 e-메일을 보냈다. "전효숙 헌재소장 임명동의안 철회는 의회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나 다름없다. 한나라당은 물리력으로 의회민주주의의 요체인 표결 절차마저 봉쇄했다. 또 끝내 굴복하고 만 참여정부는 스스로 조종을 친 종지기가 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명백한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언론 및 지성의 침묵과 외면이다. (중략) 우리 사회에도 1900년대 초 프랑스를 휩쓸던 극우의 광기가 흐르고 있다."

비서실장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국민의 여론을 제대로 전달하는 충언(忠言)이다. 김정렴씨는 "피살된 호스테스(정인숙씨)가 박 대통령의 여자였다"는 시중의 헛소문을 보고하지 않았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고 한다. YS가 싫어해도 박관용 실장은 아들 현철씨에 관한 바깥의 나쁜 여론을 전했다.

이 실장은 노 대통령에게 얼마나 직언했는가. 대연정이나 하야 시사 같은 엉뚱한 언행에 직언했는가, 아니면 맞장구를 쳤는가. 그가 그토록 원망하는 전효숙 헌재소장 좌절엔 무엇보다 대통령 비서실의 책임이 크다. 비서실장과 민정비서실이 헌법을 꼼꼼히 살폈더라면 그런 위헌 소동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야당과 언론을 비난하니 그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후임자는 '이병완 학습효과'를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탈선한 비서실장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비서실장은 국민에게 소리칠 게 아니라 뒤를 돌아 대통령에게 얘기해야 한다. 하산길의 불안한 대통령을 잘 부축해야 한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