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5)-제87화 서울야화(2)|여운형 주도… 언론장악후 전국치안 유지|보복 두려워 일경들 밀선도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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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월15일 정오 일왕의 항복방송이 있고나서 저녁때가 되자 큰길, 작은 길에 포장을 친 음식점이 나타나 하얀 쌀밥을 먹이고, 없던 술이 터져나와 마음대로 술을 퍼주어서 세상은 별안간에 별천지낙원이 된 것 같았다.
밤새도록 골목골목이 만세소리 환호성으로 들떠있었고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고 떠돌아다녔다.
이튿날 16일 아침 원서동에 있는 회문중학교 교정에서 민중대회가 있었다.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한 청소년들이 장내를 정리하고 넓은 운동장이 꽉 찼는데 여운형이 단위에 올라가 전날아침에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나 이야기한 것을 보고하고, 앞으로 빠른 시일안에 새국가를 건설해 나가자고 열변을 토하였다.
15일 저녁에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고 안재홍·장덕수가 부위원장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조직되었고 16일 저녁 경성방송국을 통해 안재홍이 그 유명한 『우선 배불리 먹고…』로 시작되는 국민에게 고하는 연설이 있었다.
17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신문사·방송국을 장악하고 전국 각지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하여 보안대·치안대·학도대등으로 하여금 전국의 치안을 유지하게 하였다.
이날 감옥에시 풀려나온 공산당의 거물들이 신문사로 몰려와서 매일신보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얼굴이 창백하고 광목 고의 적삼을 입은 사람 7∼8명이 왔었는데, 그중에는 나의 대학동창인 이중업군도 끼여있었다.
그때는 신문사에 자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이 자치위원회에서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접수는 절차를 밟아 차차 하기로 하고 그대신 공산당에서 원하는 기사를 잘 내줄테니 무슨 부탁이고 하라고 하였다.
그때 그들은 매우 신사적이어서 양해하겠다고 하고 순순히 물러갔다.
그때부터 「접수」란 말이 유행해서 관공서나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은행같은데 마구 들어가 「접수」라는 붉은 딱지를 붙이고 재산을 몰수한다고 하였다.
일본사람들은 패전국이라 당장에 기가 푹 죽어서 꼼짝못하고 고분고분 조선사람이 하라는 대로 했다.
개중에는 아니꼬워하는 표독스런 눈들도 있었지만, 저희들이 어떻게 될지 후환이 두려워 분을 참고 있었다. 군대는 아직 미군이 무장해제를 하지 않았으므로 총칼을 그냥 가지고 있어서 마구 다둘수 없었다.
총독부에서는 15일부터 기밀문서를 태우느라 법석이었고 군대는 군수품이 잔뜩 들어있는 창고에 불을 질렀다.
16일 오후에 소련군이 서울로 들어온다는 소문때문에 총독부에서 법석을 치른것 같았다.
16일 오후부터 깊은 밤에 이르기까지 서울역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붉은 기가 무수히 휘날리고 붉은 혁명이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이것은 허황된 소문이고 8월10일에 웅기를 점령하고 12일에 나진·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20일 원산에 상륙했고 24일에야 평양에 들어와서 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8월16일 오후1시에 당시 약학전문교수던 도봉섭이 경영하는 종로5가에 있는 계농연구소에 임화가 주동이 되어 유진오·최용달·도봉섭이 모여 조선혁명의 현단계를 「부르좌 민주혁명」이라고 규정짓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중앙협의회 아래에 「조선문학건설본부」「조선연극건설본부」등을 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즉시 일행이 종로네거리 한청빌딩 4층에 있는 전조선문인협회사무실로 가서 거기 모여있는 김모등을 비롯한 친일파 문인들을 내쫓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간판을 써붙였다.
17일에는 일본군대가 다시 나타나서 요소마다 배치돼 조선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고 항복문서에 조인도 하지 않았으니 그전 그대로 저희들이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동안에 일본인 경찰관들은 저희들이 저지른 죄악때문에 조선사람한테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밀선을 타고 몰래 일본으로 도망쳐갔다.
종로경찰서 고등계의 미와(삼륜)주임은 우리나라의 사상범을 제일 많이 잡아들이고 악독한 고문을 가한 악마같은 놈이었는데, 이 자는 8월14일 밤에 서울을 빠져나가 부산에서 밀선을 타고 저희나라로 도망쳐갔다.
이래서 보복을 받아야 마땅할 놈은 죄다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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