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공지영과 유미리가 다른 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김주영의 소설 '아들의 겨울'과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에서 등장인물의 동생은 물에 빠져 죽는다. 실제로 김 작가의 동생은 젊은 나이에 수영하다 익사했다. 역시 작가의 체험은 그의 작품세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래서 작가에게 체험을 지우라고, 작품으로 쓰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다.

소설 '아들의 겨울'이 김주영 작가의 아픈 가족사를 반영하기는 했지만, 죽은 동생의 구체적인 성격 묘사만큼은 실제와 다르다. 소설에선 형.동생의 기질이 다르고 어머니의 사랑을 놓고 서로 다투는 관계로 설정돼 있다. 실제로는 아주 호흡이 잘 맞는 형제였다. 바로 이 점에서 '아들의 겨울'은 분명한 창작물이다. 소설과 실제를 혼동하는 눈으로 '천궁의 칼'이나 '겨울새'를 읽으면 김 작가의 부친은 백정이나 소몰이꾼일 법하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공무원이었다(이웃집에 백정이 살고 있었다).

작가는 경험에서 우러난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못 겪었다면 간접체험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숙명이다. 체험과 작품의 상관관계는 평론가들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가 작가의 체험이나 사생활을 작품과 지나치게 동일시할 경우 한낱 관음증(觀淫症) 수준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프로 작가들이 모인 문단에서도 작품과 실제의 일치 여부는 심심치 않은 이야깃거리다. 재작년 한 여성시인의 시집이 나오자 문단이 술렁거렸다. 시에 묘사된 동물의 모델로 여러 저명인사들이 지목됐다. 시집도 꽤 많이 팔렸다. 소문은 밑도 끝도 없이 술자리 안줏감으로 회자되다 제풀에 잦아들었다. 한 작가의 소설에는 그의 불륜 체험이 짙게 배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작품에서 가장의 가정폭력을 묘사한 작가를 두고 많은 이가 불행했을 성장기를 가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품일 뿐이니까.

하지만 세상 만사에는 한계와 정도가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2년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의 데뷔작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에 대해 출판 금지 결정을 내렸다. 일본에서 소설이 실존 인물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출판 금지 처분을 받은 첫 사례다. 유 작가의 소설에 자세히 묘사된 한국인 여성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낸 소송에서 원고가 이긴 것이다. 여성은 얼굴에 선천성 장애가 있었는데, 유 작가는 얼굴 모양은 물론 출신대학, 유학간 곳, 성장과정, 부친의 직업 등을 실제 그대로 써버렸다. 판결에 대해 일본 문단에선 반론이 더 우세했지만 유미리씨는 결국 해당 여성을 실제와 다르게 묘사한 수정본을 책으로 펴냈다.

본지에 공지영 작가의 소설 '즐거운 나의 집'이 연재되고 있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여성의 신산(辛酸)한 삶과 성(姓)이 다른 아이들의 심리 묘사가 역시 탁월하다. 단순한 가족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사적 의미가 큰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법원은 며칠 전 공 작가의 전 남편이 "인격권과 프라이버시권을 침해당할 우려가 있다"며 낸 소설 게재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완성되지도 않은 작품을 문제삼은 전례 없는 사건이다. 법원은 '소설을 읽는 독자가 모델이 된 인물을 특정할 수 있고, 해당 인물의 프라이버시가 중대하게 침해될 경우에만 출판을 금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일본 법원도 기본 인식은 같았다. 그러나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즐거운 나의 집'(게재분)은 표현 정도나 피해 가능성에서 큰 차이가 난다. 양국 법원의 결론도 그래서 달라졌다. 어쨌든 이번 사건은 공지영씨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 문화계 전체를 위해 정말 다행이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