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요구에 미측의 절제 있어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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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미통상관계가 또 한차례의 가파른 고빗길로 치닫고 있다. 묵은 쟁점들에 덧붙여 새로운 이슈들이 한꺼번에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양국정부간의 빈번한 접촉과 회동이 이뤄지는 올 연말은 양국간 통상현안을 둘러싼 격론으로 지샐 것이 분명하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에 걸려 있는 쌀개방문제,금융시장개방의 속도와 범위,그리고 과소비추방운동 등을 둘러싼 신경전이 날로 첨예화하고 있어 이들 문제들에 관한 양국의 입장조정만 해도 양국 통상외교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는 별도로 최근 미국측은 한국은행의 신용카드 자료조사활동과 입법추진중인 파라미드식 판매규제를 두고 수입규제 의도가 담긴 조치로 항의하고 나섰으며 내무부가 추진중인 부산항 컨테이너세 부과에 대해서도 이를 부당해운 행위로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중앙일보 28일자 보도)
전면적이고 무차별적인 통상압력의 성격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미국의 새로운 문제제기들은 내년의 미국 대통령선거와 이와 결부돼 있는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의 타결시한을 눈앞에 둔 시점에 이뤄졌을 뿐 아니라 11월과 12월초로 예정된 미국의 부시 대통령,모스 배커 상공장관,그리고 칼라 힐스 무역대표부 대표의 방한과 때를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제기된 문제들의 하나하나에 대한 실무적 검토는 양국의 통상관계자들의 손에 맡겨질 일이지만 여기서 미국측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역의 공정성 실현을 위한 요구와 주장이 자칫 압력행사나 내정간섭의 인상을 불러 일으키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현실과 여건의 변화에 따라 정부가 동원하는 수많은 정책수단들중 일부는 당초에 의도한 주된 정책효과와는 별도로 수입억제의 부수적 효과를 낳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이를 두고 마치 그 정책수단 자체가 수입규제만을 주된 목표로 삼은 것처럼 문제를 확대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미국이 항의한 것으로 알려진 신용카드사용의 자료조사도 그 한 실례에 해당하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경제실정에서 소비억제정책은 누가 보아도 정당하고 적절한 것이며 그것이 국산품과 수입품의 소비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는 일이다.
이 경우 통화량과 금리 등 주로 거시경제정책 수단에 의존하는 미국의 정책 수행패턴과 자주 미시적 대응책을 곁들이는 한국의 관행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도량도 필요하다고 본다.
통상외교분야에서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를 보면서 우리 정부도 한층 강력한 대응수단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 국회에서 정부와 국회가 큰 목소리로 쌀개방 절대불가를 외친 것은 의지의 결연함을 과시하는데는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것을 통상외교의 현실속에서 관철시킬 전략과 논거의 개발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 외침은 한낱 빈말로 끝나고 말 것이다. 각박하고 살벌해져가는 통상분규의 추세에 비해 우리의 대응이 너무 안이하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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