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71. 선(線)의 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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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라·노 컬렉션 아래 스케치는 1980년 필자가 미국 뉴욕 쇼룸을 열 때 바이어들에게 보낸 초청장에 직접 그려 넣은 디자인들이다.

노르드스트롬 백화점과 삭스 백화점으로부터 여러 차례 패션쇼 개최 제의가 들어왔다. '디자이너를 만나보는 쇼((Meet Designer Show)'라는 것으로 인기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초청해 미니 패션쇼를 열고 고객들과 직접 대화하는 이벤트였다.

여러 번 미루다가 로스앤젤레스의 노르드스트롬 백화점과 시카고의 삭스 백화점에서 잇따라 패션쇼를 열기로 했다. 노르드스트롬 백화점에 노라 노 의상을 입은 많은 고객이 왔다. 쇼가 끝나자 모두 몰려와 악수를 청했다. 고객들은 한 목소리로 "노라 노 옷은 입었을 때 편하고 더 빛난다"며 나를 추켜세웠다.

이 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금발의 모델이 입고 나온 베이지색 드레스였다. 베이지색이 금발 미녀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우리 동양 여성에게 베이지색은 자칫하면 피부색을 더 노랗게 보이게도 할 수 있는 조심스러운 색깔이다. 그러나 금발 여인에게는 베이지색 옷이 완벽하게 어울렸다. 미국 시장에서 베이지색 옷이 왜 가장 잘 팔리는지를 그때 실감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쇼를 끝내고 시카고 공항에 도착했다. 출구에서 단정한 차림새의 한 흑인 남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듯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검은색 리무진에 올랐다. 흑인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검은색 리무진에 검정 수트를 입은 그 흑인 남성을 보고 있자니 말할 때 드러나는 새햐얀 이가 그토록 인상적일 수 없었다.

그는 호텔에 도착해 내 숙박 수속을 끝낸 뒤 신문 한 장을 전해주고는 곧 떠났다. 그 신문은 노라 노 패션쇼 기사가 실린 시카고 타임스였다. 패션쇼 날짜.시간과 디자이너 등이 소개돼 있었다. 그는 삭스 백화점의 디자이너 매장 총책임자였다. 다음날 성공적으로 쇼를 끝내고 고객들의 환영 속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서 만났던 삭스 백화점의 매니저는 내가 뉴욕행 비행기에 탈 때까지 일일이 신경을 써주었다.

그 뒤부터 나는 프린트의 색 코디네이션을 할 때 뉴욕 쇼룸에서 근무하는 세일즈 담당자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색깔을 다양하게 쓰지 않는다. 한국 전통 물감에 대해 알아보니 색상이 다채롭지는 않았다. 우리의 동양화도 대부분 흑백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線)'에 대해서는 대단히 섬세하고 까다롭다. 우리 조상은 그림.도자기.건축.의상에 있어서 수준 높은 선의 미학을 갖고 있다. 저고리의 깃.섭.소매.도령 등과 자그마한 버선 하나에도 얼마나 아름다운 선이 숨어 있는지는 내 할머니가 지은 버선으로도 잘 안다. 내 디자인에 그런 선의 미학이 작용한 것 같다. 우리는 오랜 세월 소재 빈곤 속에서 '색' 감각 대신 '선'의 미감을 키워온 것이 아닐까.

노라·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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