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관료 출신에 점령당한 대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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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국 54개 국.공립대의 현직.직전 총장 가운데 약 14%가 장.차관 등 고위 관료 출신이라고 한다. 교수 출신으로 관직을 거쳐 총장이 된 사람까지 따지면 더 많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가 조사한 결과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대학 업무는 전혀 알지 못하는 관료 출신들이 대학의 본질인 교육.연구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대학의 관료화가 이렇게 심각한 수준이니, 우리 대학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겠는가.

고위 관료들의 대학 점령 현상은 사립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대학을 지나치게 통제하다 보니 대학들은 관료 출신을 통해 정부에 줄을 대고 외풍을 막으려는 것이다. 숱한 규제를 피해가고, 연구비 등을 받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대학들이 찾기도 하지만, 고위 관료들도 이런 점을 들어 접근하고 해당 부처들은 지원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이다. 터무니없는 규제가 비정상적인 현상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대학이 관료화되면 폐해가 크다. 관료 출신 총장 가운데는 대학 구성원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 보전에만 급급하거나 정.관계에 나갈 기회가 생기면 재임 도중에도 그만두는 사람이 적지 않다. 총장을 출세용 발판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교수는 정치권으로 외도했다가 총장으로 가려고 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이런 일이 빈번하면 평생 대학.학문 발전에 힘써 온 교수들의 힘이 빠지고, 대학 경쟁력이 약해질 것은 뻔하다.

해답은 대학 자율화 확대밖에 없다. 대학들이 정부 눈치를 보지 않는 풍토가 돼야 관료 출신이 설 땅이 사라진다. 이를 위해선 정부의 대학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정부 조직을 축소해야 한다. 교육인적자원부의 대학 관련 조직이 커지면서 대학 간섭이 심해졌다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한국 정부의 지나친 대학 규제를 비판하면서 교육부 기능을 대폭 축소하라고 권고했다. 다른 부처들도 예산.연구비 등으로 대학에 간섭한다. 이런 질곡 속에서는 대학이 발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