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학 위주 「성장론」밀어붙여 "이권 챙겼다" 투서 잇따르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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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5·16 혁명군부의 눈에 띈 오씨는 61년 기술관료의 길로 들어선다. 상공부 화학과장·경공업과장·공업1국장·기획관리실장·광공차관보의 궤적이 그것이다.
「박정희 회장」의 대한민국 중화학 그룹이 보여준 첫 번째 특성은 뭐니뭐니해도 「돌파력」일 것이다. 국가 총동원체제에 버금가는 모양새로 차관을 끌어들이고 기업가를 공단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논산훈련소에서 신병을 뽑아내 듯 기능공을 양성해냈다.
제1순위 돌파작업은 중화학의 뼈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지금도 경제관리·업계 사이에서 성외논의 고전처럼 되어 있는 「공업구조 개편론」이다.
김광모 씨의 회고담.

<까짓 것 한번 해보자>
『박대통령이 중화학 건설을 선언하기 한달 전쯤 청와대 별관1층 회의실에서 최종 전략회의가 있었어요. 그 방에는 그때 우리나라 기술진이 처음으로 만든 박격포·수류탄들이 전시되고 있어 의미가 깊었죠.
박대통령과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오수석이 수십 장이나 되는 브리핑 차트를 넘겨가며 「공업구조 개편론」을 역설했어요. 1백억 달러 수출, 1인당 국민소득 1천 달러란 목표를 정해놓고 부문별로 마스터플랜을 세운 거죠.
석유화학·기계·조선·비철금속·전자·철강 등 6개 중점 투자업종이 소개됐어요. 어디에다 무슨 공장을 짓고 언제까지 얼마나 만들어 내겠다는 거였죠.』
김씨는 증언을 이어갔다.
『브리핑이 끝나자 박대통령은 경제장관 한사람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어요. 그 장관은 오수석에게 「자금이 전부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죠.
오수석이 「국내자본과 외국차관 모두 합쳐 1백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하자 그 장관은 「너무 많이 드는 거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더군요.
오원철씨는 『무덤까지 가지고갈 책 한권을 고른다면 공업구조 개편론』이라고 말한다. 10·26후 칩거생활에 들어간 오씨는 반포아파트 자기 집에 「3공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1주일에 한번 꼴로는 꺼내 읽는 것 같았다. 오씨의 이야기.
『물론 중화학 기획단장은 나였지만 이 책에는 많은 관리·학자·기업가의 땀이 배어있습니다. 6개월 정도 걸려 완성했는데 어려움도 많았지요.
도대체 전세계를 둘러봐도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사례가 드물어 모방할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백지위에 그림을 그리는 기분으로 했죠. 아쉬운게 많았지만 특히 우리나라 인구가 그랬어요.

<「오창원」별명 얻어>
그 무렵 남쪽이 3천만 명이었는데 중화학 국가가 되기엔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남쪽과 북쪽을 합치면 진짜 멋들어진 공업국가를 만들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돈걱정도 간단치 않았지요. 말이 1백억 달러지 그때 사정으론 엄청난 액수였으니까요. 고민 끝에「까짓 것 한번 해보자」는 배짱이 생기더라고요.』
이렇게 해서 중화학건설의 망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보자」는 작업이었으니 공장굴뚝 하나 하나마다 사연도 주렁주렁 달렸던 모양이다.
오수석과 인연이 없는 곳이 없지만 그중 에서도 창원기계공단이 으뜸이라고 한다.
공업진흥청차장을 지내다 오수석에게 잡혀 창원공단 이사장(74∼80년)으로 차출됐던 최종명 씨 (현 대한통운 국제운송사장)가 들려주는 스토리.
『오수석을 「오창원」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입지선정부터 도시계획까지 그가 깊숙이 개입했으니까요.
오수석은 공군시절 사천비행장에 근무할 때 창원을 자주 놀러다녀 그곳을 잘 알았어요. 그때부터 찍어둔거죠. 창원자체도 공단입지로는 기가 막혔고요.
보세요. 대구∼포항∼진주∼마산으로 이어지는 기계공업 삼각지대 속에 놓여 있잖아요. 방위산업 단지여서 경비가 중요한데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산으로 둘러싸여 요새처럼 되고요.
거기에다가 항구도 옆에 있고 물도 낙동강에서 끌어다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일부에서는 「구미·포항·울산에 이어 또 경상도냐」는 말을 했지만 그렇질 않아요.』
오씨는 『이런 사정 말고도 특별한 사연이 또 있다』고 한다.

<이권 손댄 적 없다>
『창원을 고를 때는 근로자 문제도 있었어요. 구미단지에 여성근로자들만 모여있는 경우가 많다보니 사기에 문제가 있더라고요. 창원은 기계공단인지라 남성근로자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가까운 마산 수출자유공단에 여성근로자들이 많으니 다행스럽더군요. 실제로 공단 내에 만남의 광장을 조성해 놓았죠.』
중화학이란 대물을 만지다보니 오수석은 세간으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너무 독불장군 식으로 밀어붙인다』는 불평에서부터 『어떤 업체를 봐주고 이권을 챙겼다』는 공격까지 여러 갈래였다고 한다.
사실 삼성·현대·럭키·대우 같은 대기업의 지도부가 그의 사무실을 왕래하던 터였으니 말많은 재계에서 항설이 아니 생기면 이상할 법도 했다.
박대통령 앞에는 『오원철이란 자가 이곳저곳에서 장난친다』는 투서가 적잖이 날아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를 가까이 서 지켜본 전직 정부고위관리 Y씨의 기억.
『박대통령이 정보기관을 시켜 투서내용을 조사한 적도 있어요. 조사결과 어떤 것은 박대통령이 오수석한테 지시한 사항인데 억울하게 오수석이 몰린 경우도 있곤 했죠.
그러면 박대통령은 오수석에게 투서를 보여주면서 「임자에 대해서 이런 것이 들어오니 각별히 몸조심해」라고 일러주기도 했대요.』
오씨는 『일하다보면 그런 일도 겪는 거 아니냐』며 이렇게 주장했다.
『내가 내 입으로 이야기하면 설득력이 없을 테니 박대통령이나 김정렴비서실장이란 거울을 통해서 한번 보세요.
그 분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 밑에서 돈이나 이권을 챙겼다면 8년 동안 수석비서관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청백리였다는 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월급 말고 다른 수입도 있었어요. 기업총수들과 같이 일하다 보니 명절 때면 인사치레로 들어오는 봉투가 있었는데 사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마저 왜 단속을 못했느냐고 하면 할말이 없지요. 그러나 나는 맹세코 중화학·방위산업을 추진하면서 돈을 챙기거나 이권에 손댄 일은 없습니다.』
오씨는 『그 당시 중화학은 사막지대와도 같아 어느 누구도 나서서 뛰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서로 하겠다는 기업 중에서 누굴 고른 게 아니라 안 하겠다는 사람들을 설득해 떠맡겼다』는 자기변론을 덧붙였다.

<안정론자의 견제>
10·26후 오씨에게 붙여진 「21억」 부정축재 혐의는 아직 유효한지라 오씨 변론을 검증하기 위해선 엄격한 작업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그런 식의 이권거래는 워낙 은밀한 것이어서 집어내기가 힘든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현재 확인되는 대목은 증언자군의 상당수가 부정거래설에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는 점이다.
상공부 방산국장·기업차관보를 지낸 이광덕씨(현 데이터뱅크 사장)의 오씨 옹호론.
『지금 한번 물어보세요. 중화학을 하고싶었는데 오씨 때문에 부당하게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씨가 워낙 대기업 총수들과 친하다보니 오해가 생긴 거예요. 오씨는 재벌기업가들과 속마음을 나눌 정도였거든요.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기업가들이 오수석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어요. H자동차의 J사장은 독일 폴크스바겐 회사와의 합작문제를 상의하기도 했고 K자동차의 K회장은 신차개발 아이디어를 얻어내기도 했대요.
그뿐인가요. H화약의 K회장은 회사가 엄청난 사고를 내 사면초가에 몰리다 오수석이 도와주자 눈물까지 흘린 적도 있다고 들었어요.
모양새가 그렇다보니「오수석이 세다」에서부터 출발해 좋지 못한 말들이 떠돌게 되는 거죠.
「오원철과 중화학」을 둘러싼 시빗거리 중 부정거래설 못지 않게 뜨거운 부분은 과잉중복 투자논쟁일 것이다. 박대통령의 정치·경제 메커니즘이 막바지로 향하던 79년 신현확 부총리·강경식기획차관보(5공 재무장관·청와대 비서실장 역임)를 필두로 한 경제기획원 사단은 중화학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그리고 이들의 안정론은 5공내내 위력을 발휘했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오원철 전 경제2수석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사단은 이에 대해 결연히 반격하고있다. 『중화학은 수출과 안보에 크게 기여했고 5공, 6공은 그 과실을 챙겼다』는 지론이다.
창과 방패가 부딪치듯 성장론과 안정론이 마주치는 이 충돌점은 대단한 흥미 거리가 아닐 수 없다. <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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