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경성야화|조용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당시 서울의 구가에서는 양반과 평민을 가리는 습관이 대단해 상류층은 서민들과 왕래하기를 꺼리고 창피하게 알았었다.
그러던 것이 상류층 부인이든, 서민의 아낙네든 신분을 묻지 않고 한줄로 늘어서서 서로 양동이를 주고받으니 여기에서 신분의 상하가 저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상류층 마님이 상민의 여자와 한 줄에 서서 주고받고 평등하게 놀아대므로 이렇게 되어 가지고는 양반행세를 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때까지 남아있던 계급의 관념이 저절로 무너져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쌀배급·설탕배급·석유배급·술배급이 실시되어 아낙네들이 날마다 쌀부대·설탕봉지·석유병을 들고 그때 문자로 「나라비」(한줄로 서있다는 뜻의 일본말)를 섰으니 양반도 없고 상민도 없었다. 모두들 서민들인 것이다.
부녀자의 이런 복색이 이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 어언간에 「몸뻬」와 흰 블라우스로 통일되어 버렸다.
저고리·치마는 정장할 때나 입고 평상복으로는 대부분이 몸뻬와 블라우스·스웨터로 지내게 되었다.
해방 된지 40년이 지난 80년대까지도 부인네들은 치마를 안입고 손쉽게 양복바지 같은 몸뻬를 입고 다니게 되었다.
머리모양도 그전에는 반드시 쪽찐 머리에 비녀를 꽂고 다녔는데 전쟁 때 금비녀·은비녀를 모두 빼앗아가 비녀가 없어진 때문인지 쪽찐 머리한 여자를 볼 수 없었다.
혹 늙은 부인네나 쪽찐 머리에 비녀를 꽂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새둥지 같은 머리에 양장을 하고 샌들을 신고 다니니 이것이 전쟁 전에는 생각도 못한 복식의 변화다.
이때부티 국민생활이 점점 죄어 들어가기 시작해 쌀을 비롯한 모든 일용물품이 배급제가 시행돼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금붙이는 거의 모두 빼앗겼고 집에 있는 놋그릇·쇠붙이까지 헌납되어 갔다.
거리의 풍경으로는 술이 배급제가 되어 청주를 한사람 앞에 한홉씩 밖에 팔지 않고 그것도 큰길술집 앞에 기다란 행렬을 지어 우두커니 서서 기다려야 했다.
저녁때가 되면 술집 앞에는 술꾼들의 행렬이 길게 뻗쳐있었다.
배급 나온 술을 다 팔고 술집문을 초저녁에 닫아버리니 길은 조용 하였다.
이래서 술주정꾼이 있을 리 없고 가게문을 일찍 닫으니 죽은 거리 같았다.
남자들은 갈색 국방복에 전투모를 쓰고 각반을 치고 다녔다.
어쩌다 신사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을 보면 낯설게 보였다.
여자들은 검정 몸뻬 일색으로 거리는 어둡고 살벌하였다. 고기맛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고 어쩌다 흰 쌀밥을 보게되면 눈이 부실지경이었다. 잡곡 배급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적은 분량이어서 항상 배가 고팠고 헛헛증이 나서 일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을 총독부사람들은 인고단련이라고 불렀다.
l939년 11월에 필경 조선사람에게 창씨개명을 실시할 것을 공포하고 1940년 2월11일부터 실시한다고 발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때까지 총독부에서 취한 강압정책을 돌아보면 1937년에는 황민화운동을 급진적으로 전개시켜 일왕한테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신민서사」란 것을 만들어 모든 집회에서 제창하게 하였다.
1938년에는 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해 한국의 청소년들을 강제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만들었다.
또 조선어교육을 폐지시키는 동시에 일본말을 국어로 상용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일본식 성명 「다나카」「나카무라」등으로 창씨개명하기를 강요하여 민족을 아주 없애버리려는 민족말살운동의 최후단계에 들어선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조선을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만들어 일본에서 군수산업을 옮겨오고 값싼 임금과 긴 노동시간을 강요하더니 다시 조선사람을 강제로 징용해 광산·공장 등에서 마구 부려먹었다.
1940년 현재 조선 안에서 2백60만명, 일본과 그 밖의 점령지역에서 72만명이란 엄청난 숫자의 조선사람이 강제 징용됐다. <고려대 명예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