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카메라맨 이석기-150편 촬영한 베테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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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석기 카메라맨(1940년생)은 지금까지 1백50편의 극영화를 촬영했고 얼마 전까지는 촬영감독협회장도 지낸 베테랑 중의 베테랑 촬영 기사.
그런데 그는 촬영 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연출에도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 5년 전에 백결씨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성 리수일뎐』(87년)으로 감독 데뷔, 『집시애마』(90년)를 거쳐 최근의 흥행성공작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91년)를 발표해 훌륭하게 감독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네 번째 작품으로는 이사림 원작의 『땅 끝에 선 사람들』의 시나리오를 최근 완성하고 10월 하순 알래스카 올 로케로 크랭크인한다. 『낙타…』에선 미국서부에서 자멸해 가는 사랑을 그리더니 이번엔 미국북부 오지 설원에서의 사랑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의 제1작 『성 리수일뎐』은 일종의 사회풍자극으로 전문가들 사이에선 호평 받았으나 5만명 밖에 안 들었고, 제2작『집시애마』는 일종의 섹스오락영화로 쉽게 13만명이 들어 주목받았고, 제3작 『낙타…』는 무려 18만명이 들어 그를 일약 흥행감독 자리에 앉혔다.
그는 연세대 이공대 2학년 때 삼촌 이병삼씨(청주대교수)가 촬영기사로 일하는 현장에 조수로 뛰어들어 5년간 배우고 『보경아가씨』,(66년. 노진섭 감독)로 카메라맨 데뷔했다.
이범삼씨는 당초 임응식씨 등과 청사진을 하다가 영화촬영으로 돌았던 분으로 40편쯤 했다.
연출에 대해선 촬영을 50편쯤하고 나서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촬영은 연출의 펜 노릇이라고나 봐야 할까. 촬영은 촬영하는 몇 분간만 신경을 쓰면 되니까 자칫 안일해지기 쉽고 영화전체의 흐름을 모른다. 1백50편을 촬영하는 동안 50편까지는 작품내용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보다 화면 하나 하나의 구도에만 몰입했다. 그러나 50편쯤 후부터는 드라마 전체를 보게되며 드라마 형성에 필요한 화면이나 색감을 추구하게 되었다.
카메라는 좋은데 드라마가 안 좋은 경우 또는 드라마는 좋은데 카메라가 안 좋은 경우는 연출·촬영의 작업상조화가 잘 안됐을 때 나타나는 결과로 보인다.
이만희 감독의 『군번 없는 용사』(66년)를 광릉 얼음판에서 찍을 때는 담당촬영기사 이범삼씨가 있는데도 지원 촬영 나갔었다. 괴뢰군 공격을 받아 국군트럭 등이 폭파되어 전멸하는 장면이었다. 미니어처촬영이 없을 때니까 실체로 할 수밖에 없었다.
트럭이 폭파되어 화염에 싸이니까 차 주인이 차를 건지려고 물을 떠다 불을 끄려했다. 이때 이석기는 감독의 사인이 없는데도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맹 스피드로 찍어 상당한 효과를 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만희는 이석기를 좋아하기 시작, 『싸리골의 신화』(67년)를 비롯, 10여 작품을 같이 했다.
이만희는 어떤 사물이든 그것을 분석, 그 핵심을 찾아내 영화로 만들 수 있는 감독으로 보였는데, 우선 영상의 의미를 아는 사람 같았다. 물론 개성이 강해 고집을 부러 자기 성격대로 묘사하는 경향은 있었다.
『창공에 산다』(68년·이만희 감독)를 찍을 때는 F-5 전폭기를 타고 5만 피트 상공에서 20시간 찍었는데 공군의 블랙 이글이라는 에어쇼를 다 찍었다. 그 때문에 청각장애가 생겨 지금도 안 좋다. 요새는 렌즈가 자유자재로운 것이 많지만 그때는 1백30mm 줌렌즈뿐이었다.
2백 피트 짜리 필름 매거진 2개를 가지고 올라가 좁은 조종석 옆에서 찍었다. 보통 90분간 체공하는데 한번은 촬영기가 고장났다. 그러나 조종사는 무전연락 후 내려가지 않고 수직상승, 음속 돌파 등 온갖 에어쇼를 다하고 있었다. 한번 뜬 비행기는 연료를 완전히 소모하고 착륙하지 않으면 위험했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르고 있던 이석기는 이때 반 죽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공포(?)의 촬영이었다. 그러나 이석기는 이 영화로 대종상 촬영 상을 처음으로 탔다.
이제 카메라맨 이석기는 나이 50에 감독으로 전환, 본격적으로 작품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어야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1백50편의 촬영경험은 그의 앞날을 위해 커다란 도움을 주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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