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일 강국서 '안보 공동체' 시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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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7일 서울국제포럼이 주최한 ‘패러다임 전환: 정치, 안보 및 경제 질서의 변동’ 세미나 참석자들. 오른쪽부터 존 아이켄베리 프린스턴대 교수, 칼 카이저 하버드대 교수, 사회를 맡은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키쇼어 마부바니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 김병국 고려대 교수. [사진=김성룡 기자]

"미국 주도의 유일 강국 체제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서울국제포럼(회장 한승주)이 창립 20주년 기념으로 26일과 27일 이틀간 주최한 '패러다임의 전환: 정치, 안보 및 경제 질서의 변동'이란 주제의 회의에서 각국의 정치.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중앙일보가 후원한 이 회의는 서울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미국과 한국 외에도 중국.일본과 아시아 각국에서 저명한 학자 20여 명이 발표.토론자로 참가했다. 다음은 토론 내용.

◆미국 주도의 유일 강국 체제 바뀐다

▶한승주(서울국제포럼 회장)=냉전이 종식된 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 세계는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다. 중국.인도.브라질 같이 국제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신흥 강국들이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조셉 나이 교수의 말처럼 미국이 없으면 세계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 미국이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칼 카이저(하버드대)= 2차대전의 승자인 기존의 5개 안보리 상임이사국(미.러.중.영.프)과 안보리 상임 이사국이 늘어날 경우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는 독일.일본.인도.남아공.브라질이 현 국제 질서의 강국이다. 다극체제 아래에서도 미국은 여전히 세계 제일의 강국이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다른 국가의 것을 모두 합친 정도로 많다. 하지만 테러리즘의 확산과 에너지 위기 같은 국제 질서의 급속한 변화 때문에 미국이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긴 어려워졌다. 이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2기의 노선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발칸 반도의 코소보 인종학살에 유엔의 결의 없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개입한 예에서 보듯이 도덕적으로 필요하고 긴급한 상황에서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행동하는 일이 앞으로 종종 발생할 수 있다.

▶존 아이켄베리(프린스턴대)=미국이 주도하는 유일 강국 체제는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국제 질서지만 이제 무너지고 있다. 미국은 세계적으로 선제적 차원에서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각국으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마을에 보안관이 단 한 명뿐이고 모든 집에 자물쇠가 없으며, 범죄가 일어나기도 전에 보안관이 함부로 집에 들어와 사람들을 체포해 가는 형국이다.

▶키쇼어 마부바니(싱가포르 국립대)=아시아 국가들은 현존 국제 질서의 가장 큰 수혜자다. 인도나 일본.중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 덕분이었다. 아시아 국가들은 이 체제의 가장 큰 무임승차국이기도 하다. 현 국제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아시아 국가들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

◆흔들리는 아시아 안보

▶데니스 블레어(전 태평양 사령관)=안정적인 핵 균형이 존재하던 아시아의 안보는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개발, 미국과 일본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 일본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 등으로 과거와 같은 형태로 지속할 수 없게 됐다. 특히 중국은 인도를 제외한 모든 이웃 나라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어 중국 육.해.공 군사력의 강화는 주변 나라에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다. 아시아에서 미군이 대규모로 철수할 가능성은 작아 보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접근법은 테러리즘, 쓰나미(지진 해일) 등 아시아가 직면하는 도전에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대응하는 '안보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미 양국의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 결정은 과거로 회귀하는 비효과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나토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다자가 공동 협의해 작전권을 행사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전작권 행사에서 지금처럼 한국이 종속적,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구조는 바뀌어야 하지만 어쨌든 양국의 전작권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적으로 행사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정민(싱가포르 국립대)=중국이 다시 과거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등장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국은 일본.인도뿐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베트남.인도네시아.한국.카자흐스탄 등과 외교 무대를 공유해야 한다. 강력한 멤버로 구성된 '위대한 아시아'는 아시아 지역에서 과거의 평화를 유지하게 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안보 딜레마를 불러올 수도 있다.

◆중국과 일본의 역할이 아시아 평화에 결정적

▶유숩 와난디(자카르타 포스트)=대만 정부의 움직임을 쉽게 예측할 순 없지만 양안(중국과 대만) 문제는 통제 불가능한 수준의 심각한 위기로 치닫지는 않으리라 본다. 중.일 관계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취임한 이후 급속히 발전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두 나라는 젊은 세대가 서로 교류하는 등 프랑스.독일과 같은 모델의 협력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미.중 관계는 가장 중요하지만 복잡하다. 중국을 국제 무대의 주요 플레이어로 대접하는 미국의 정책은 적절하다.

▶왕지스(베이징대)=중국은 과거처럼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중화사상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의 70%는 무역에서 오는 것이며 수입되는 석유의 80%는 말라카 해협을 통해 들어온다. 지난해 말 중국 CC-TV가 과거 역사 속 강국들의 부흥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방영했다. 과거의 강국들은 혁명보다는 단계적 발전이나 진화를 추구하는 태도로 부흥을 이끌었다는 결론이었다. 중국은 '개방된 지역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을 지역 문제에서 고립시키거나 아시아의 나토를 만들려는 시도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선호하는 다자간 지역 협의 체제는 6자 회담의 큰 틀이 유지되는 방식이다. 중국과 북한을 더 이상 과거의 혈맹 관계로 보면 곤란하다. 중국은 대북 관계를 다른 국가와의 관계와 비슷하게 정상적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다다시 야마모토(일본국제교류센터)=일본은 동북 아시아 공동체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지역 내 다른 국가와 밀접한 협의를 할 필요가 있다. 정부 간뿐 아니라 비정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환경 오염과 다국적 테러리즘과 같은 다양한 위협에 공동 대응하고 미국.유럽은 물론 아시아 다른 국가의 신뢰를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대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글=최지영·백일현 기자<choiji@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패러다임=미국의 과학 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머스 쿤이 1962년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틀 또는 개념의 집합체를 말한다. 오늘날에는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 현상을 정의하는 개념으로 확대돼 사용되고 있다. 쿤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생성.발전.쇠퇴.대체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고 주장했다. 서울국제포럼의 주제 '패러다임의 전환'도 이 같은 정의에 바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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