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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의무 다하려 유학갔다 귀국하더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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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7일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윤장호 병장의 어머니 이창희씨가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고 있다(왼쪽). 윤 병장의 미니홈피에 있는 가족 사진(오른쪽). 윤 병장 부모가 중학교 때 아들을 미국에 보낸 뒤 2003년 현지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뱉듯이) 이게 분단의 비극도 아니고 뭐야? 외국 나가서. 평화유지군이잖아? 아들이 한 달 있으면 귀국하는데…. 아들하고 살아야 하는 게 꿈인데. 아들 없으니 어떻게 살아.

군(국방부)에서 온 사람 말로는 자살폭탄 맞아서 얼굴과 팔다리는 있는데, 내장이 나갔나봐. 하얀 천 덮어 냉동했대.

2003년 12월에 (우리가) 미국 가서 장호랑 플로리다 마이애미비치 간 게 중1 때 (장호가) 미국 간 뒤 처음으로 미국에서 가족여행한 거야. 아들과 같이 여행하는 게 (아버지) 꿈 아닌가. 아들이 운전하고 우리가 뒤에 타고….

유학비자라 3년간은 군대 안 가도 됐는데 군대 가려고 한국 나왔어. 미국에서 취업하면 취업비자 나오니까 맘 먹으면 군대 안 갈 수도 있었어. 우리 마음은 그랬지만 장호는 오랫동안 외국 생활해서 애국심이 있었어. 워낙 운동을 많이 해서 체력 좋다 보니 특전사로 빠졌고."

27일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자택에서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고(故) 윤장호 병장의 아버지 윤희철(64)씨는 아들의 죽음이 믿기지 않은 듯했다. 막내인 윤 병장 등 2남1녀를 모두 외국에 보내놓고 둘만이 지내던 부모는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적이 있는 어머니 이창희(60)씨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장대 쪽에 다가섰다. "영정 사진도 없는데…. 여권 사진이라도 찾아서 확대해야 하는데…." 어머니는 서랍을 뒤지다 "우리 아들 너무 고생만 하다 갔어. 엄마 사랑 못 받아서 내가 너무 미안해. 어쩌면 좋아"하며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윤 병장은 온화하면서도 독립심이 강한 성격이었으며, 효심도 지극했다고 한다. 여유롭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고학으로 미국 유학생활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장호가 중학교 1학년 때 혼자 유학 가서 미국 생활 10년 중 95년에 딱 한 번밖에 한국에 못 나왔다"고 말했다. 윤 병장의 셋째 이모 이영희씨는 "장호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미국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면서 "다른 집처럼 부모가 권한 게 아니라 장호 스스로 결정해 유학을 간 것"이라고 했다. 윤 병장은 미국에 있는 이모의 집에 머물며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에 따르면 윤 병장은 대학 때 식당에서 서빙을 해 생활비를 벌었다.

아버지는 "아프가니스탄 가겠다는 걸 내가 반대하니까 '외국 생활을 많이 해서 괜찮으니 전혀 걱정마시라' 했다"며 "지난 설 전에도 전화 통화를 했는데 몸 건강하게 잘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윤 병장은 지난해 5월 형 장혁씨의 미니홈피에 "나 이번에 해외 파병 지원해. 엄마도 반대 안 해. 꼭 가게 기도해줘. 가야 돼"라는 글을 남겨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윤 병장은 2004년 12월 군 입대를 위해 귀국해서 입대 전까지 영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학 자금을 모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난해 가을 윤 병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내온 편지를 펼쳤다.

"여기 생활은 괜찮아. 한국에서 군생활 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미군들도 많아서 영어도 쓰고, 한국 식당이 와서 밥해 주는데 반찬도 많고 군대밥보다 맛있고 고기도 끼니마다 나와. 당분간은 엄마랑 아빠랑 둘이만 있겠네. 형아랑 누나도 없는데 심심하겠다. 여기 위험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6개월 동안 건강히 있다가 갈 테니까 그때 봐요."

윤 병장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윤 병장 부모는 3월 1일 자식의 주검을 마주하러 아프가니스탄으로 출국한다.

성시윤.권근영.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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