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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마이너리티의 충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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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느 유력 기업의 최고경영인은 날이 갈수록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검찰의 비자금 수사진이 언제 그의 사무실에 들이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건 시장의 동향이다. 그는 매일 출근하자마자 외국인 투자자들의 지분율을 확인한다. 그들이 시장에서 사들인 주식이 어느 정도인지 소액주주 등 다른 투자자들과의 연계 움직임은 없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정보력을 총동원한다. 그는 자신이 회사에서 쫓겨나는 악몽에 몇번 시달렸다. 기업 간의 적대적 흡수.합병(M&A) 움직임이 이토록 공포의 수준으로 다가오리라고는 예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기업 사장들도 M&A의 두려움을 느끼긴 마찬가지다.

요즘 대기업과 중견기업 오너들은 몹시 화가 나있다. 새해 사업계획을 짜서 시장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대선자금 등에 관한 정치권 수사가 난관에 부닥치자 검찰이 기업을 압박하고 그 여파로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을 지지부진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수사 결과가 자칫 기업의 이미지를 악화시켜 시장의 냉대가 경영권을 위협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나 대한상공회의소 간부들은 경제.사회 각층에 자리잡고 있는 마이너리티의 소리에 귀 기울여오지 못한 지난날을 후회도 하고 짜증도 낸다. 권익보장을 요구하는 소액 투자자들의 목소리를 이해하려고 하나 대화하기가 쉽지 않단다. 소액주주들 또한 투자기업과의 대화 창구가 마땅치 않다고 비판한다. 어떻든 유수한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을 판가름할 내년 초 정기주총을 앞두고 캐스팅보트를 쥔 외국인 투자자와 소액투자자들의 향배에 업계가 촉각을 세우고 있다. SK㈜가 우울증에 걸린 대표 기업 가운데 하나다.

경영인들의 푸념 가운데 정부건 어디건 대화할 파트너가 없다는 무주공산론은 정치권의 마이너리티 현상 때문에 더욱 확산되고 있다. 소수집단끼리 벌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충돌과 마찰이 기업의 사회적 비용 지출을 늘리게 했다. 국정을 총괄하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거대 야당의 지휘권을 잡은 최병렬 대표는 하나같이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소수자로서의 리더십에 한계를 드러냈다. 경제가 비틀려 아우성이 들려도 대립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정치 마이너리티의 독재며 큰 정당의 소수 독재다.

사실을 말하자면 정치가 불안해도 외국인들은 주식을 별로 팔지 않았다. 주가가 잠시 요동쳤을 뿐이다. 야당 총재가 단식투쟁 해도 그들은 끄덕도 안 했다.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해도, 미군 철수나 재배치 논쟁이 일어도 주식시장은 그다지 냉각되지 않았다. 요량 없는 정치 마이너리티의 행동은 투자변수에서도 제외된 느낌이다. 외국인 투자심리에 영향을 주는 건 오히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일부 경제 마이너리티들이다.

기업들은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흡수.합병을 시도하고 저돌적으로 공격한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투명 경영을 서두르는 것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독약(毒藥)전략을 구사한다. 대규모 주식을 발행해 공격 의지를 약화시키는, 남의 우물에 독약을 타는 훼방행위다. 그러나 그것이 난공불락의 방어책은 아니다. 공격자가 소액주주와 결탁하면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그래서 경영인들은 그들의 목소리도 듣고자 한다. 그러나 여야 정치권에 시선조차 보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형편없는 투쟁적 마이너리티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누구를 믿어야 하느냐고 묻는 건 비극인가 희극인가.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