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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샐러리맨 신화' 꿈꾸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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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 부회장은 산동네 전셋집에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회생활은 무선호출기(삐삐) 영업사원으로 시작했다. 그리곤 10평짜리 아파트를 판 돈 4000만원으로 연매출 3조원의 팬택 계열을 일궈냈다. 지금의 그는? 분명 현재의 박 부회장은 실패한 최고경영자(CEO)다. 재무구조가 취약한데도 무리하게 회사 몸집을 불렸다. 경쟁사들의 공세 속에서 벌인 영업전략은 먹히지 않았다. 자초한 실패인지 모른다. 그런데 박 부회장,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며 훌훌 털어 버렸다고 했다. "이제는 죽을 각오로 회사 살리기에 올인하겠다"고 되뇌었다. "어차피 바닥에서 시작한 인생인데, 더 이상 잃을 게 뭐냐"면서.

박 부회장의 좌절은 애플 CEO 스티브 잡스의 그것에 비할까. 자기가 끌어들인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잡스의 기구한 운명 말이다. 잡스는 미혼모의 손을 떠나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20대에 애플사를 설립, 최초의 개인용컴퓨터(PC)가 히트하면서 큰 부자가 됐다. 그러나 오만의 결과일까. 컴퓨터의 대명사 IBM이 PC를 출시했을 때도 "IBM을 환영합니다"라는 광고를 낼 정도로 기고만장하더니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독선 때문에 오히려 회사에서 축출당했다. 그렇지만 잡스는 멋지게 재기했다. 애니메이션인 토이스토리.벅스라이프.몬스터주식회사가 대박을 낳았다. 그리고는 쫓겨난 지 13년 만에 애플 CEO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은 1위를 달리고 있고 곧 첨단 휴대전화 아이폰을 선보인다.

고립무원(孤立無援) 신세는 박 부회장보다 잡스가 더했을 것이다. 다행히 요즘 박 부회장은 채권단을 부지런히 오가며 재기를 꾀한다는 소식이다. 팬택은 여전히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신제품을 계속 출시하고 있다. 일본 수출도 호조세를 보인다고 한다. 그도 한국판 잡스가 될 수 있을까. 그의 재기는 결코 그를 위해서가 아니다. 4500명 전.현직 팬택 임직원의 소망만도 아니다. 팍팍한 일상의 모든 샐러리맨에게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라는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때 팬택은 외환위기.벤처 거품을 딛고 웅진코웨이와 함께 매출액 1조원으로 발돋움한 유이(有二)한 기업이었다. 술 자리가 끝날 무렵, 박 부회장의 주치의가 말했다. "당신이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샐러리맨의 기대가 무너지는 거여". 떠나는 그를 배웅하며 문득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가 떠올랐다.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박병엽 신화'는 일단 막을 내렸다. 과연 그가 신념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진짜 성공신화는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정선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