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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조지상백일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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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가 아직 작은 물방울이었을 때
파초잎에 후둘거리는 소나기를 꿈꾸었네
싱싱한 남은 꿈들로 타오르던 물줄기.
우리가 푸르디 푸른 바다로 출렁일 때
한 소절 부르리라, 꿈의 종착지에서
구슬피 울러퍼지는 내 영혼의 연가를….
박혜정 <부산시 동래구 온천3동 1461의58>
차상
귀뚜라미
사랑방 창호지에 단물풍이 드는 날은 들녘마다 배부른 곡식, 금물결 출렁이고 이슥한 뒷 뜨락에선 귀뚜리가 울었다.
수묵빛 가을밤의 고요를 깨는 저 소리꿈속 갈피마다 떨리는 그 노래에 떠나지 못한 나그네 불면의 밤은 깊다.
최경자<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남산연립 가동 309호>
차하
여름 이후
지열은 돌을 키워
큰 바위를 만들다.
어렴풋이 달빛 따라
그 숲길 그림자 따라
저 멀리 경비 초소엔
소금으로 남는 살비듬.
크기가 맞지 않는
한 켤레 군화를 신고
모래톱 묻혀오던
가고 남은 발자국들
다시는 자라지 않을
분노로 익는 모래알.
박미숙<대구시 남구 대명9동 912의 6>
입선
아파트의 달
창공을 지나가다
숲에 걸린 철새처럼
반쪽 날개 퍼득이며
옥상에 누워 밤 지새다
하얗게 눈썹이 센 달
여명을 안고 쓰러진다.
김갑동 <부산시 해운대구 반여3동 현대아파트 4동503>
가을밤의 귀로
저기 먼 산봉우리 별들이 눈을 뜨고 돌무지 메밀밭은 달빛에 눈부신 밤. 국화꽃 향기 그윽한 외딴집을 지난다.
잠든 마을 곁으로 여울은 깨어있고 바람은 머물다가 한바퀴 원을 돈다. 풀벌레 숲마다 울어 고향이 가까운 듯·….
이우식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사무소>
석류
못잊어
그리움을 구슬처럼 엮어놓고
알알이 영근 사랑
진홍으로 물들이면
끝끝내 침묵의 언어
터뜨리는 아픔이여
서숙진<서울 종로구 숭인1동 56의17>
고향 생각
내 어머니 고향집엔
과일나무 휘어지고
솔가지 타는 소리,
조부님의 기침소리
때까치 젖은 목청이
엽서인 양 반갑다.
경진희<경기도 의왕시 244의1 우성4차아파트 가동212호>
낙동강
펄럭이는 기폭에
푸른 바람 달고
굽이치는 물결은
구름따라 칠백리
오늘도 도도한 몸짓
낙동강은 흐른다.
하늘거리는 갈꽃에
강바람 절로 일고
먹이 찾는 철새떼
자맥질을 하는구나
낙조에 젖는 삿대
낙동강은 흐른다.
조호영 <부산시 금정구 부곡3동 219의15>
초대시조
서울 달맞이
박연신
유리창 닦아
한가위 달을 매단다
어머닐 그려보다 아버질 앉혀보다
애닳인 오랜 시름을 풀어
마음 뒷산에 달 띄운다.
상처 밟아 꽃되라고
눈물 떨궈 키운 달빛
채이는 새금파리
어린날의 꽃씨 몇봉지
지닌 것 그 모두 털어버린
저물녘의 긴 그림자.
그저, 낙서라도
달빛 먹여 걸구는데
영마루 넘지못한 하늘빛은 또, 서먹하고
먹물든
상심의 내 울안
지는 잎도
달로 뜬다.

<시작메모>
해마다 추석날 성묘를 가면 어머니께 잘 풀리지 않는 내 삶의 길을 묻곤 했다.
한데 금년에는 귀성단 대이동으로 인한 심각한 교통난 때문에 성묘를 가지 못해 그만 온종일 거실에서 한가위 달을 맞으며 서성거렸다.
언제나 그랬듯 한가위 달은 어머니 마음같이 크고 둥그렀다. 이 좁은 내 울안의 공간에서 이렇게 좋은 달을 바라보니 새삼 난 삶을 소유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6·25동란의 요란한 포성과 나의 울부짖음이 되살아나 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장면들이 몇개 유리조각으로 내 발끝에 채이곤 했다.
육성으로는 이제 울지도 못해 흐느낌으로 통곡하며 이대로 그냥 서서 오래 오래 서성거렸다.
◇약력▲42년 전주출생▲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골동품」당선▲시조집 『비가』 『하늘 닿게 걷고 싶다』등.
심사평
장원 특별한 기교없이 격갖춰 돋보여
차상 계절감각에도 잘 어울리는 작품
장원에 뽑힌 박혜정씨의 『파도소리』는 쉽게 읽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쉽다라는 표현은 그만큼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았는데도 한편의 시로서의 격을 갖춘것은 역량 때문일 것이다. 강과 강의 연결은 물론 수를 잇는 고리도 아주 자연스러운 작품이었다. 아울러 시조의 틀에 너무 얽매여 가성을 듣는 것같은 여느 투고작과는 대별되었다.
차상에 오른 최경자씨의 『귀뚜라미』는 계절에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꿈속 갈피마다 떨리는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차하에 오른 박미숙씨의 『여름이후』는 앞의 두작품에 비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좀 거친 듯했다. 메시지 전달이 분명하지 않을 때 자칫 오류를 가져온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이밖에 입선에 오른 『고향생각』과 『가을밤의 귀로』는 시적 긴장을 갖추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평범한 생각일지라도 시로 형상화하는 데에는 어떤 시적 긴장의 장치를 한 두군데 해두어야만 한다. 특히 시조에서는 한 장(장) 정도의 그런 장치가 절대 필요하다.
이러한 말은 『낙동강』 『석류』 『아파트의 달』등에도 적용된다.
시가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이 계절에 잘 익은 과일 같은 시조의 투고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윤금초 박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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