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대통령 말씀」/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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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현대판 어사출또 시대에 살고있다.
추석을 앞둔 지난 19일에는 내무부 소속 특별 암행 감찰요원 등이 부산시 어느 구청에 들이닥쳐 「일어 섯!」명령을 내린뒤 공무원들의 책상 서랍을 수색하고 호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지는 소동을 벌였다. 그것도 민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작년에도 사정당국이 일부 공무원들의 예금계좌를 죄다 조사했다. 그 조사강도가 너무 심했던지 예금비밀에 관한 보호고 뭐고 없이 민간인들에게까지 이것저것 마구 손을 댄다는 소문으로 확대돼 시중자금시장도 얼어 붙었다.
○느닷없는 어사출또
명절이 다가올때마다 어김없이 공무원들의 부정·비리를 적발하기 위한 한파가 예고된다. 사회가 시끌벅적하거나 수출이 부진하고 과소비가 극심해 「위기」라는 여론이 일어나면 다시 어사출또로 문제를 잠재우려 한다. 정부의 그같은 행정권 행사에는 틀에 박힌 패턴이 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처방을 지시하면 장관들은 새삼스럽게 야간작업으 하며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또 산하 기관장회의를 열어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초비상이 걸리고 각 계통조직이 경직적으로 운용된다.
노태우 대통령은 지난 5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현경제팀의 경제정책 실정을 질타했던 것으로 발표됐다.
대통령이 경제상황에 대한 강한 불만과 함께 경제팀의 「책임」문제까지 거론했다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뒤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각 부처마다 총출동 태세에 들어간다. 장관들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이 공장을 순시하고 밀수단속반이 몇몇 시장에 들어닥치며 세무서원들이 유흥·향락업소 입회조사를 실시한다. 중앙은행(한국은행)총재 마저 급기야 은행장회의를 소집한다.
국제수지 적자를 당장 줄일 묘안은 없으나 「확고한 대처방안」을 내놓아야 하는 분위기때문에 응급처방에 쫓긴다.
겨울에 기름파동이 나든말든 원유수입을 보류하자는 안까지 나왔다. 일의 내용보다는 일하는 티를 내는 것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돼왔다.
대통령책임제 아래서는 경제정책의 실정책임도 대통령에게로 돌아간다. 대통령이 경제전문가가 될 수 없는 이상,큰 원칙만을 정해주고 구체적인 정책수단은 경제팀의 협의·조정하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구도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관계장관들에게 직을 걸고 물가를 한자리수 이내로 억제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물가가 10%이상 오르면 무능장관으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상요인을 눌러 댄다. 그 부작용으로 특정품목의 생산과 공급이 어려워지는 사태가 일어나도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론의 공격도 무섭기때문에 장관들은 물가정책의 소신도 버리고 우왕좌왕 한다.
대통령이 총통화증가율마저 언급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선은 지켜야 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돈을 풀고 거둬들이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일정수준이상 되면 실책으로 받아들여질까봐 결국 관계자들이 무리수를 써가며 지시에 따른다.
○응급처방에만 급급
3공이나 5공때 대통령은 더욱 미시적인 경제분야까지 언급했다. 경제성장률·물가에서부터 어느 지역에 다리를 놓는 일에까지…. 그래서 공무원들은 더욱 추종적이고 한건주의식 발상으로 「위기」를 땜질해왔다.
80년대에는 세계에서 두개의 커다란 경제정책이 실험되었다. 「활력있는 자본주의 국가로의 재건」을 표방한 대처 영국총리의 정책과 「강한 국가의 재현」을 강조하는 레이건 미국대통령의 정책이 그것이다.
그러나 레이건의 공급경제학이 실패하고 대처주의(또는 대처경제학)가 성공한 이유는 어디 있는가. 선진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대처는 의식혁명부터 시작했다.
세금감면·규제완화·국영기업 민영화·노조대책 등을 통해 경제의욕을 자극했으며 많은 비판·비난에도 불구하고 원칙에 충실했다.
노대통령은 5공때 물거품이 되었던 금융거래실명제와 수도권집중억제대책을 내놓았다가 또 물러서고만 가슴아픈 일을 직접 경험했다. 그것을 추진한다는 것은 6공에 독약과 같은 것이며 인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쾌한 정책이념」을 실현해 나가는데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난제들이 많다.
그럴수록 국민들이 「바로 이거다」하고 느낄만한 줄거리를 잡아주고 끌어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통화의 자유로운 교환을 확대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IMF(국제통화기금) 8조국으로 이행하는 자발적 조치를 취했다.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18조 B항을 졸업함으로써 수입조차 마음대로 규제할 수도 없다.
○대처리즘 교훈 삼자
금융자유화에 이어 자본자유화 시기도 3개월후로 다가섰으며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입도 논의되고 있다. 거의 완전한 개방경제체제다.
지금까지 경제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말씀」은 고단위 항생제와 같은 즉효성을 나타냈지만 국제화시대에는 즉효성 이상의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정책의 골간을 무엇으로,어떻게 세울 것이냐가 문제다. 골프장 출입금지와 해제를 되풀이하고 벼락치기 사치성업소 단속,공무원 호주머니 뒤지기와 같은 폐쇄적·추종적 사고방식으로는 한국병 치유는 까마득하다.
대처 전 영국총리가 재임 10년을 청산한뒤 최근에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대처주의는 어떤 원칙과 신념으로 강하게 지탱돼 왔다. 컨센서스(의견의 일치)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보다는 원리원칙과 신념이 더 중요하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정권을 담당해 왔다.』<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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