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란 "생각하는 만큼 보여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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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학의 대가이자 금석학자였던 청명(靑溟) 임창순 선생은 경기도 마석에 지곡서당을 설립해 후학을 양성하며 만년을 보냈다. 바둑을 좋아하여 매년 서당에서 후학들의 바둑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그때는 서봉수 9단이나 장수영 9단 등 쟁쟁한 프로들이 심판을 자청하여 불원천리 찾아가곤 했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맑고 정정하기 이를 데 없던 선생은 그러나 어느날 문득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제자들은 "단짝 바둑 친구가 있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신 후부터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고 기운을 잃으셨다"고 했다. 청명 선생에게 친구와의 바둑은 바둑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둑은 즐거움과 마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또한 교육적 측면, 즉 청소년들의 정신 단련에도 유익하다.

만약에 바둑이 서양이나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면 세계는 온통 바둑 열풍에 휩싸여 있을 것이란 얘기도 설득력이 있다.

미국이라면 두뇌 개발에 좋은 바둑의 장점을 기막히게 홍보하여 이를 야구나 농구처럼 세계적 사업으로 연결시켰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나 바둑은 어느 시대나 반대자들이 존재했던 특이한 게임이기도 하다.

중국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는 바둑 구경을 즐겼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조정 중신들이 밤을 새워 바둑을 두는 풍조를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바둑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둑 TV가 6개월 넘게 진행하고 있는'생각의 힘'이란 시리즈를 통해 바둑 매니어라 할 수 있는 각계 인사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의 지극한 바둑 사랑과 바둑 예찬론을 종합해본다.

예찬론 말 … 말 … 말 …

▶이외수(소설가)="바둑의 진정한 가치는 정신에 있다. 한편의 대하소설처럼 돌 하나에 깊은 교훈이 있고 인격을 고양시키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준다. 바둑을 배운다는 것은 거대한 인생을 설계하고 실천하고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다." 아마 초단, 인터넷 바둑도 즐긴다.

▶유홍준(문화재청장)="문화나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 사고력을 포함한 지식 축적이 없이는 높은 차원에 도달할 수 없다. 모두가 높은 차원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며 생각하는 힘이 요구된다. 바둑은 바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 아마 5단. 바둑에 대한 글도 썼다.

▶성신제(성신제 피자 대표)= "육체적 근육은 한계가 있다. 나이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세월이 갈수록 더 강해지는 근육. 그것은 생각의 근육이다. 바둑은 이 근육을 키워준다. 생각의 근육은 육체 근육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아마 5단. 젊은 프로기사를 후원하기도 했다.

▶구대성(야구선수)="바둑의 색은 흑과 백으로 단순하지만 바둑판을 그려 보면 야구판과 비슷하다. 바둑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승부라는 차원에서 야구경기와도 많은 연관이 있다." 7급. 중요한 시합 전에 대국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최양락(개그맨)="바둑을 두는 시간은 시끄럽고 정신없는 세상에서 집중력을 가질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다. 생각을 많이 하고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산만하고 정신없이 사시는 분들께 바둑을 추천한다."10급. 한동안 슬럼프를 겪을 때 바둑을 접했고 '알까기'라는 아이템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바둑TV에도 가끔 출연한다.

▶이은진(외국어대 교수)="정신적 활동의 대표적인 게임이 바둑이다. 바둑은 상당히 깊은 고등 정신 능력이 필요하다. 추리력.분석력 등 논리적 능력이 관련된 놀이가 바둑이라고 생각한다. 바둑을 통해 학생들이 그런 능력들을 잘 기를 수 있다면 자발적인 학습 참여를 기대할 수 있다"

▶엄재경(게임 해설가)="e-스포츠로서의 스타크래프트는 육체적.기능적 숙련이 필요하다. 지략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기능이 갖춰져야 한다. 바둑은 기능적인 제약이 없는 순수한 정신 스포츠다. 바둑은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승부를 가린다."

▶샤빗 프라그만(이스라엘 바둑협회장)="바둑의 최고 장점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높여준다는 점이다. 또 상상력과 추리력을 키울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인데, 더욱 높이 살 점은 내가 한판의 바둑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바둑인 수를 3년 동안 10배로 키운 인물.

▶유키 시게노(국제바둑연맹 사무국장)="이탈리아에서 10년 살았는데 그곳 바둑 클럽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이처럼 바둑은 사람을 만나게 한다. 바둑은 또 힘들고 괴로운 일상을 이겨낼 수 있도록 단련시키고 성장시켜 준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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