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노나메기 특강] 4. 장산곶 매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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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산곶 매 이야기'는 우리 겨레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 문학(구비문학)이다. 이 땅에 살았던 민중의 애환과 염원을 동물에 빗대 가장 사실적으로 전해 온 이 이야기를 신화로 오해하면 안된다.

예부터 많이 전해오는 날짐승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도 장산곶 매는 가장 탁월하다. 그 매가 처음 살았던 곳은 황해도 구월산이었다. 매의 외아들인 '벌떡이'가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장산곶으로 도망와 살면서 민초들의 구원의 희망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벌떡이가 곧 장산곶 매인 셈이다. 한낮에도 캄캄한 어둠이 지배하던 시절 구월산 매의 아들이 태어나자 해가 '벌떡' 일어나듯 솟아올랐다고 해서 '벌떡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매'와 상반된 날짐승으로 '수리'가 등장한다. '수리'가 악독한 권력자의 패박(상징)이라면, '매'는 이 땅 무지랭이들 기상의 패박이자 염원이라 할 수 있다.

구월산에서는 야릇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구월산 둘레에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들도 부지런해 가을걷이가 끈끈함에도 일꾼들의 가난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었다. 더욱이 힘센 자들이 암난이(처녀)를 독차지해 암난이는 시집을 못가고, 숫난이(총각)는 장가를 못가는 일이 허다했다. 이런 상황에서 포도청 기둥을 들이 받으며 힘센 자들을 물리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구월산 매다. 하지만 외아들 벌떡이가 당시 유행하던 목사리(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목사리를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약은 흰두루(백두산)에만 자라는 '별만이'라는 풀. 그 풀은 구월산 매만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풀을 찾아 돌아오던 구월산 매는 풀의 효험을 탐낸 힘센 자들의 독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 이후 구월산 매의 외아들 벌떡이의 고난이 시작된다. 벌떡이는 아버지를 탄압하던 무리들에게 날개가 꺾이고, 부리와 발톱이 뽑히는 등 죽을 고생을 다하다 겨우 땅 속을 뚫고 기어 기어 바다 끝 어느 벼랑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장산곶이었다. 날짐승이 땅을 기는 것은 이 땅의 조상들의 비극이요, 깎아지른 벼랑은 우리 겨레의 운명이자 이 땅에 살아 온 양심있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언제부턴가 장산곶엔 이상한 불빛이 비쳐 이곳을 지나가는 배들이 등대처럼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그것은 바로 어린 장산곶 매가 흘린 눈물의 빛이었다.

*** 황석영 '장길산'에 인용되기도

통일운동가 백기완(70)씨는 29일 늦은 6시 서울 대학로의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열린 '노나메기 특강'네번째 순서가 개인적으로 매우 뜻깊은 자리라고 했다. 이 날의 주제인 '장산곶 매 이야기'는 자신이 65년 전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들은 이래, 이곳 저곳에서 개인적으로 털어 놓은 적은 있지만 공식 석상에서 강연을 하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입소문으로 전해들은 황석영씨가 소설 '장길산'에 일부 소개하기도 했다.

"이야기 문학은 글이 아니라,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말림'"이라면서, 백씨는 때론 격정으로 때론 낮은 목소리로 '말림'을 선보였다. 예정된 한시간 반을 넘기면서 백씨는 전체 줄거리를 다 말하려면 30회는 더 해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올 노나메기 특강은 이번으로 끝나며 내년에 계속된다. 노나메기는 '함께 땀 흘리며 일하고 함께 잘 살자'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배영대 기자<balance@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사진 설명 전문>
최병수 화백의 걸개 그림 '장산곶 매'앞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백기완씨는 "앞은 보이지만 나아갈 길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장산곶 매가 나아갈 길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평했다. [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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