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8) 제86화 경성야화(43) 조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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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대관원근처 관수동 일대에는 중국상점이 많고 중국사람도 많이 살고 있었다.
지게꾼들을 부추겨서 중국상점을 부수라고 하는 것인데 지게꾼들은 중국상인들하고 가까운터라 까닭없이 해칠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그때 유명했던 만보산사건의 발단이었다.
만주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국농민들이 논을 개간하려고 물길을 트기위하여 공사를 하게되자 중국농가에 약간의 손해가 있었다.
이때문에 중국농민들과 한국농민들 사이에 층돌이 있었지만 별로 큰 사건은 아니었고 쌍방이 화해가 되었었다.
이것을 크게 선전해서 인근의 한중양국 농민들에게 싸움을 붙이고, 본국인 조선에까지 과장선전해 한국사람과 중국사람의 충돌 을조작해 낸 것은 일본군부와 그 앞잡아 경찰이었다.
7월보름께 조선사람들은 되놈오랑캐가 우리동포를 까닭없이 많이 죽였으니, 우리도 보복해야한다고 닥치는대로 중국 가게를 부수고 중국사람을 살상해 중국인촌을 공포의 거리로 만들었다.
나도 대관원 앞길에서 본 것이 있었으므로 서소문일대의 중국인촌에 가보았었다.
일본 경찰에 매수당한 젊은 불량배들이 떼를 지어 마구 중국인상점을 부수고 있었다.
중국사람은 모두 피신해서 아무도 없었고 돈에 팔린 조선사람불량배만 날뛰며 중국촌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경찰이 그냥 서서 보기만 할 뿐 불량배를 말리러 들지 않는 것이었다.
불량배들의 이런 폭행을 제지하는 흉내라도 내야 하겠는데 그냥 서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이 소란이 서울에서는 약과였다.
제일 심한 곳이 중국사람이 많이 사는 인천과 평양, 진남포였다.
사상자가 백명이나 되고 상점·요리집·민가의 파괴·약탈이 심했었다.
이것이 열흘넘게 계속 되었는데, 신문들이 연일 그러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은근히 이것을 부추기는쪽이 있으니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중국인에게 대해 이런 폭행을 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생각하면 그때부터 이미 일제는 만주사변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밀한 사이인 중국사람과 조선사람사이를 이간질해서 서로 원수를 만들어놓고 이어서 만주 큰 땅덩어리를 먹어버리자는 것이 일본군부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사실은 9월에 들어서 일본군의 만주사변 조작으로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그렇고, 까닭없이 날벼락을 맞은 중국사람에 대한 우리국민들의 미안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해 가을에 부서진 가게를 고치고있는 동네 호떡집중국주인에게 넌지시 『이번 일은 조선사람이 한짓이 아니다』고 하니까 『즈다오』(알고있다)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하였다.
1929년 세계경제 공황이 닥치자 미국과 유럽각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공장이 모두 문을 닫고 실업자가 거리에 범람하게 됐다.
비참한 빈곤때문에 적화사상이 고개를 들어서 공산당이 꼬리를 물고 검거되었다. 이렇게 사회적 불안이 극도에 달하였었다.
일본군부에서는 이 공황을 해결하는 길은 만주를 일본 땅으로 먹어버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만주의 철·석탄·석유등 무진장의 자원을 개발하면 일본은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겸해서 그때 만주의 주인인 장학량이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들어서 만주에 있는 일본의 권익을 박탈해갈 기세였으므로 일본으로서는 한시바삐 행동을 일으켜야할 판이었다.
이래서 9월18일 밤 10시를 기해 미리 매수한 중국 병정을 시켜 만철본선(만철본선)인 북대영 부근의 유성구(유성구) 철교를 폭파시켰다.
일본 수비대에서는 이것이 중국군대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북대영에서 중국군을 공격함으로써 중일교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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