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감독, 엘리트주의를 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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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오후 10시로 예정됐던 만남은 11시가 넘어서야 시작됐다. 코칭스태프 회의가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몇 시에 주무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각종 미팅에다 비디오 분석 하다 보면 오전 2시를 넘기 일쑤지요. 그래도 오전 6시에는 일어납니다" 라고 대답했다. 과연 차붐다운 체력이었다. 14일 프로축구 수원 삼성의 일본 구마모토 전지훈련 숙소인 데루사 호텔, 차범근 감독 방에서 마주앉았다.

전지훈련 성과와 주요 선수의 컨디션, 차 감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까지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지도 철학으로 넘어갔고, 급기야 '엘리트주의' 라는 민감한 문제에 닿고 말았다. 그는 "내가 요구하는 수준에 따라오지 못하는 선수까지 품고 갈 수는 없다. 서울대 갈 학생은 정해져 있다. 축구든 공부든 하향 평준화는 모두를 망하게 하는 길" 이라고 말했다.

-수원은 든든한 모기업의 지원을 받고, 예산도 가장 많이 쓰고, 스타 선수도 많고, 강력한 서포터의 지원도 받는 클럽입니다. '리딩 클럽'으로서 수원이 K-리그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까.

"우리 보고 '레알 수원'이라고들 했는데, 지난 1년 반 동안 송종국.김남일 정도 빼면 그렇게 대단한 선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알 만한 선수가 여럿 있기 때문에 감독의 책임감도 큽니다. 선수들에게도 '우리는 연봉을 많이 받기 때문에 좋은 축구를 하고, 더 많이 이기고, 매너도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해 수원 경기에 평균 2만 명이 왔으면 올해는 2만5000명이 오도록 할 것입니다."

-좋은 경기를 통한 관중 증대와 K-리그 부흥, 아름다운 비전입니다. 그런데 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언제까지 모그룹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당장 필요한 선수를 돈 주고 사오는 형태 아닙니까.

"올해 우리가 영입하려다 포기한 오장은(대구→울산)과 최성국(울산→성남)의 이적료를 합치면 47억원이에요. 우리는 그런 돈은 못 씁니다. 이번에 영입한 안정환.안효연.나드손은 이적료가 한 푼도 없어요. 우리가 얼마나 회사 돈을 아끼려고 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실속 있게 선수를 보강해 좋은 경기를 하고, 경기장에 팬들을 모으는 게 구단이 자립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축구 발전을 위해 17년 동안 축구교실(차범근 축구교실)을 해 왔어요. 우리 팀(수원)도 올해부터는 유소년 축구교실을 엽니다."

-차 감독의 지도 스타일이 솔선수범인데, 이게 너무 강하다 보니 따라오기 힘들어하는 선수가 꽤 있는 것 같아요. 그 선수들을 다독여 끌고 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 구마모토에 40명 정도 왔는데 모두가 감독의 요구를 따라올 수는 없죠.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수준 높은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11명이 뛰지만 팀의 기둥은 3~5명입니다. 나머지는 벽의 역할을 하는 거죠. 기둥이 없으면 벽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어요.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하고 끌어안고 가라는 건 아마추어적인 얘기입니다. 여기는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다 죽는, 냉정한 프로 세계죠."

-차 감독의 얘기를 듣다 보면 '엘리트주의'가 느껴집니다. 이런 엘리트주의가 공격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는 당연히 엘리트주의입니다. 두 개, 세 개를 해내는 선수에게 하나만 주면 되겠습니까. 나는 우리 축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고 싶습니다. 유럽의 선진 축구를 따라잡자고 하는 거지 우리 식으로 하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할 수 있어요. 잘하는 선수는 더 잘할 수 있게 키워내야죠."

-교육에서 말하는 '수월성(秀越性)' 교육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전국에서 서울대 갈 수 있는 아이들은 정해져 있어요. 갈 수도 없는 애들 데리고 서울대 보내겠다고 하면 시간낭비죠. 수원은 돈을 많이 주지만 거기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가차없이 밀어냅니다. 나는 연봉 2000만원짜리와 1억원짜리 선수에게 똑같이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기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실험실입니다."

-말하자면, 능력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얘기인가요.

"물론이죠. 없는 능력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줍니까. 이렇게 말하면 '밑에 있는 아이들은 희망도 없고' 이런 얘기 나오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 특기대로 가면 됩니다. 공부만 하면 다 판.검사가 됩니까. 축구 상위그룹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수원에 부임하자마자 '여기는 애들 키우는 데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잘하는 선수는 얼마든지 사 오고, 유망주 육성은 유소년 클럽에서 하면 된다는 얘기였어요."

그는 올해 목표에 대해 "최고 성적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에게 삼성의 좋은 이미지를 심기 원한다. 가장 수준 높은 축구를 오래한 사람으로서 선수들을 통해 선진 축구를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구마모토=글.사진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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