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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실패, 좌파는 무죄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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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편인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돼 힐러리는 퍼스트 레이디가 됐다. 어느 날 한 참모가 "음료수는 주로 뭘 드시나요" 하고 물었다. 힐러리는 별 생각 없이 "다이어트 닥터 페퍼(탄산음료의 일종)"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몇 년간 힐러리는 '닥터 페퍼' 홍수를 맞았다. 어떤 호텔에 묵든 냉장고에는 항상 그 음료수가 꽉 차 있었다. 파티장에서도 사람들이 '닥터 페퍼'가 담긴 잔을 들고 힐러리에게 다가왔다. "내가 마법사가 된 것 같았다"고 힐러리는 적고 있다. 말 한마디로 세상이 그렇게 바뀌니 이해가 간다.

민주주의가 꽤나 정착됐다는 미국에서도 대통령 본인도 아닌 퍼스트 레이디의 말 한마디가 이 정도의 영향을 미친다. 좋든 싫든 그게 대통령제의 현실이다. 힐러리가 이 에피소드를 소개한 건 "퍼스트 레이디가 얼마나 말조심해야 하는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우리도 엇비슷하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대통령이 입을 열면 언제나 기사가 된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 설날에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 진영을 매섭게 질타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 읽어 봤다. 7300자, 200자 원고지 40장 가까운 장문이었다. 나도 글 쓰는 게 직업이라서 안다. 일기장도 아니고,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기 위해 그 정도 분량을 쓰려면 적잖은 시간을 소모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해외순방으로 바빴겠지만 개인 시간을 쪼개 썼다면 그걸 상관할 순 없다. 하지만 두 가지는 따져 보고 싶다.

첫째는 대통령이 이런 식의 논쟁에 끼어드는 게 옳은지다.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논쟁이 없었던 건 맞다. 교육.부동산.세금.병역 등 중요한 사회적 이슈와 가치들이 제대로 토론된 적이 없다. 그래서 진보 진영이 노무현 정부가 체결하려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논쟁하는 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고 서운해도 대통령이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특정 집단(진보)과 특정인(최장집 고려대 교수)을 대놓고 공격하는 건 아무래도 볼썽사납다.

둘째는 글의 내용이다. 노 대통령은 '종속이론.사회구성체이론.민족경제론.식민지 반봉건 사회론' 등을 언급했다. "현실은 그런 예언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 줬다"고 말했다. 구구절절 옳다. 하지만 궁금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동안의 정책과 발언들은 대체 무엇인가. 왜 그동안은 좌파의 주장과 논리는 모두 맞고, 보수와 우파는 모두 틀린 것처럼 행동하고 말해 왔는가. 이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없다면 노 대통령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을 것 같다.

노 대통령을 비판하는 학자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무 그러지들 마시라. 좌파 혹은 진보 진영이 한국 사회에서 뿌리내리고 지평을 넓힌 건 누가 뭐래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 대통령의 공이 크다. 비아냥대려는 게 아니다.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너무 오른쪽으로 갔다는 지적이 있었다. 보수와 진보가 공존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잘된 일이다.

하지만 정권 막판에 진보 진영이 "노무현은 우리와 다르다"고 차별화하는 모습을 보게 돼 입맛이 쓰다.

이젠 우파가 집권해도 좌파 지분은 남는 시대가 됐다. 좌파 혹은 진보 쪽에선 그런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재집권이 불가능해 보이는 노무현 정부를 끌어안는 건 어리석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차라리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게 장기적으론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집권한 보수여당을 공격하면서 좌파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는 게 세상 인심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참여정부' 실패의 책임을 모두 노 대통령에게 뒤집어 씌우는 건 아무래도 부당해 보인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좋다"는 좌파의 주장이 민주주의 원칙에 분명 맞는데도 께름칙한 건 그 때문이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