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시동인 언어유희로 "표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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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90년대의 새로운 시를 찾자』며 출범한 90년대 시동인들이 한시대의 젊은 시정신을 응집시켜 시의 방향을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요설적 시어」만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눌러만 주세요 원하는 모든 것을 뱉아 내겠어요/사랑과 애증과 욕망의 대화? 좋아요./동성연애와 매저키즘에 대하여? 좋아요./신식민주의와 매음의 비밀한 간통을? 쪼와요/아 아, 뭐든지 쪼아요 나는 다 불겠어요 조사하면 다아 나오는 거, 시치미 떼면 뭐하겠어요/나는 눌러만 주면 뭐든지 뱉아 내요…』(시「타자기」중)
시동인 「21세기·전망」 2집에 실린 시의 하나다. 위 시와 같이 90년대 시동인들의 작품은 무엇을 써야된다는 생각도 없이, 타자기를 두드리듯 별다른 의미의 연관도없이 즉흥적으로, 단편적으로 뱉어내는 시 아닌 시가 많다는 지적이 나왔다.
최근 문학평론가 정효구·이경호씨는 90년대 시동인들인 「21세기·전망」 「슬픈 시학」 「시운동」등이 펴낸 동인지들을 분석한 평론 「불운한 세대의 자화상」(『작가세계』가을호) 「90년대 동인지의 위상」을 각각 발표했다. 이들은 결론적으로 그들 작품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미건조하다. 마치 인스턴트 라면을 먹는 기분, 또는 물기없는 나무와 마주선 기분을 갖게 한다』는 평가를 하고있다.
『21세기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야합이 아닌 승화의 차원에서 만나야한다』며 90년초 유하·함민복·진이정·박인택·차창룡씨등 5명이 출범시긴 「21세기·전망」은 현재 윤제림·이선영·함성호·박용하·김중식·허수경씨가 가세, 11명이 활동하며 동인지를 2집까지 펴내고 있다.
「시와 대중문화의 접목」을 노린 이들의 시는 그러나 『현대사회의 억압되고 뒤틀리거나 타락해버린 삶의 모습을 비속하고 소모적인 요설, 혹은 말장난이 나 풍자적인 넋두리의 언어를 늘어놓거나, 그에 대한 반발로 타락한 현실로부터 분리된 유년·자연공간으로 후퇴하고있어 시를 대중문화수준으로 끌어내리거나 전통정서에 갇혀있다』고 이경호씨는 지적했다.
언어의 절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움에 집착, 80년대 민중시대에 대항해 시의 순수성을 고수했던 「시운동」은 90년 해체를 선언한후 올해초 김기택 원재훈 권대웅 이학성 장석남 이진명 전동근 이동역 이홍섭 성기수씨등 10명이 새 「시운동」을 결성해 동인지 1집을 펴냈다. 『옛 「시운동」의 순수상상력에 우리의 일상적 현실을 접목시키겠다』던 새 「시운동」동인의 작품은 현실주의의 상상력이나 도시적 상상력을 개발해내지 못하고 옛 「시운동」처럼 시의 언어성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슬픈시학」도 마찬가지다.
한편 재수록전문지 『오늘의 시』 91년도 상반기호는 좌담 「세대론의 지평」을 실었다. 90년대 평론가 박철화 이광호씨는 90년대 시인들에대해 『바로 앞세대인 유신·광주세대가 역사적 진보에대한 전망을 가지고 현실의 전위에 서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90년대세대는 역사의식에서 벗어난 세대이며 탈중심화되고 세속화된 새로운 문화적 징후에 친숙하면서 일상과 욕망의 생태학 전반에 대응하는 세대』라고 정의하며 90년대세대의 부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좌담에 참석했던 문학평론가 김주연, 시인 황지우씨는 『90년대 시들이 유희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문학의 진정성과 현실대응력을 갖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신세대 부상론에 부정적 시각을 보냈다.
90년대 시의 흐름을 보여준 위 세 동인들의 분석에서 나타났듯 유희성, 나아가 일회용 소비품같은 시가 많고 그것이 90년대의 정신을 이끌지 못한다는 강력한 시사이다. 정효구씨는 『90년대 시의 이러한 경박성이 세계에대한 깊은 인식, 혹은 정신적 고통없이 시를 쓰는 90년대 시인 자체와 문예지를 젊게 한다는 명분아래 신인들의 덜익은 작품을 마구 싣는 시단 풍토에서 비롯됐다』며 가뜩이나 대량소비사회에서 시가 위기에 처해있는 때에 90년대 시인과 시단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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